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ne Eyre Nov 10. 2019

가지 같은 시간

페랑디 5주 차 (2019.11.04 - 2019.11.09)




설거지를 하기 위해 주방 개수대 앞에 있다가 정면 창문 밖으로 하늘을 보았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이름보다는 직급으로 불렸던 시간이 더 많았다. 지금은 한 명의 외국인의 학생으로 나의 이름이 불리는 시간이 많다. 허물을 벗어버린 나를 온전하게 직면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것은 아무 방어막 없는 민낯의 나를 마주하는 것이기도 했다. 때로는 부끄럽기도 그 허물이 그립기도 했지만 나는 이런 시간이 확실히 필요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날수록 느낀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고 그것은 페랑디 생활의 1/3이 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득 달력을 보고 올해가 두 달이 남았다는 것을 알았고 나는 아직 이 곳에서 해야 할 것들과 무언가를 여전히 찾아가는 과정 위에 있었다. 파리의 가을을 온전히 느낄 시간 조차 없었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 그 보다 더 값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개수대 앞 반쯤 열린 창문으로 겨울을 알리는 바람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학교 근처 Bon marche 백화점은 벌써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냈다



지시를 하던 입장에서 지시를 받아야 하는 입장. 면접관의 입장에서 면접을 준비해야 하는 지원자의 입장. 모든 것이 반대가 되었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은 이 시간이 아니었다면 다시 경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계속 반복되는 제품과 새로운 것을 더 많이 배우지 못하고, 다양한 제품을 하지 못한 다는 것에 대한 불만은 배부른 욕심이고 의미 있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거품기로 계란을 올리는 소리가 주방을 가득 매운다. 온전하게 나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라자가 제과제빵을 하면서 차분해진다고 했을 때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야 그의 말이 조금 이해된다. 반대편에서 그 큰 거구가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체 작은 휘퍼를 힘차게 휘졌는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다양한 장비로 여러가지 시럽의 농도와 활용법을 배우는 시간



그녀의 제품을 나를 항상 돌아보게 한다


시리엘이라는 친구는 페랑디를 입학하고 그 주 주말에 결혼을 했다. 금색 뿔테의 동그란 안경과 긴 금색의 머리를 틀어 올리고 매일 아침 새벽 주방에 해맑게 들어오는 그녀는 누구보다 제품의 품질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친구다. 그녀는 내가 인정하는 크루아상의 장인이고 이제는 모두가 알듯이 나는 그녀의 팬이다. 그녀가 페랑디에서 처음 만들었던 크루아상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 충분했다. 기본적인 레시피와 파이 롤러(크루아상을 밀어 펴주는 기계) 없이 이 정도의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 자체가 신비롭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제품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양해를 구했고 그녀는 한순간에 인기스타로 등극했다. 그리고 그 이후 그녀는 나의 두 번째 선생님이 되었다. 그녀는 내가 제품에 관해 물어볼 때면 안경을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으로 치켜올리며 마치 어린아이처럼 신나서 내가 이해될 때까지 알려준다.



두번째 선생님이자 나에게는 세상 친절한 크루아상 장인



시리엘이 제품에 집중할 때는 그녀의 근처에 있거나 그녀에게 말 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이제 모두가 아는 암묵적인 사실이다. 그때만큼은 누구보다 예민하고 성격이 매우 날카로워진다. 그녀가 크루아상에 계란물 바르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면 왜 그녀의 제품이 구워져 나왔을 때 항상 일정한 색을 내는지 말해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남들보다 3배의 시간을 더 들여서 계란물을 붓으로 섬세하게 바른다. 생산량과 직결되는 매장에서는 그녀의 그런 부분이 답답하고 좋은 직원이 아니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작업 속도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빨라질 수 있지만 섬세함과 청결한 작업 환경은 처음에 제대로 몸에 베이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면 더 고치기 힘들다. 그것들이 갖추어지고 속도가 생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나는 이미 계란물을 다 바르고 그녀의 그런 모습을 한참 지켜보았다. 그녀가 계란물을 다 바르고 나를 보더니 안경을 치켜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제품은 내 제품을 항상 반성하게 한다. 속도에만 중점을 두면 모든 것이 무너 질 수 있다.



거울 같은 초코 타르트와 한국에서 일할때 수도 없이 했던 브리오쉬 꼬기





벤치마킹

제품을 만드는 것만큼 다른 사람이 만든 제품을 먹어보고 관찰하는 것은 중요하다. 심지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셰프들의 제과점이 가득한 파리다. 그것도 페랑디에서 단체로 셰프와 같이 제과점을 다니며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은 좋은 교육 방법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총 10개 정도 제과점을 3시간 정도 다 같이 걸어 다니며 셰프는 각 제과점의 특징적인 제품에 대해 설명해 주고 페랑디로 돌아와 사온 디저트를 나눠 먹고 평가하는 일정이었다. 제과점은 사실 파리에 있으면 언제든 시간 내서 갈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셰프 옆에서 그가 각자의 제과점에 대해 소개하는 이야기와 역사적인 부분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했다. 셰프는 매장의 장점에 대해 주로 이야기했으며 제품 진열의 중요성에 대해 재차 강조했다.  



그러다가 문득 한 매장 밖에서 모두들 사진 찍고 정신이 없을 때 나는 아무도 보지 못한 제품의 진열이 눈에 들어왔다. 왜 이 제품은 이렇게 진열될 수밖에 없었을까? 역사가 오래된 제과점이 많은 파리에서 그 역사로 제품의 품질을 무마시키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제품의 놓는 방향, 네임택의 위치와 형태도 오너 셰프는 고려해야 한다. 좋은 재료를 선별하는 순간부터 고객이 그 제품을 구매하기 전까지가 품질이 아니라 고객의 입속에 들어가기까지가 제품의 품질이다. 모든 순간을 잡아 내고 매일 같은 품질을 유지하는 것. 작은 것 하나 신경 쓸 수 있는 세심한 정성과 꾸준한 관심은 모든 제과사에게 주어지는 덕목은 아니었나 보다.



제품 진열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사진


설명 듣느라 제품 보느라 세상 바쁜 우리반 친구들


학교에 돌아와서 같이 제품 시식하고 토론하는 시간





모든 공정의 시작, 계량

월요일은 모두가 컨디션이 좋다. 주말 동안 충분한 휴식이 낳은 값진 결과물이다. 셰프의 설명을 듣고 일사 분란하게 흩어져 브리오쉬를 만들기 위해 재료를 계량한다. 각자 맡은 재료를 12명을 위해 한 명이 책임지고 계량한다. 브리오쉬 반죽은 수분을 전부 계란과 버터로 대체한다. 반죽 온도가 높으면 물 대신 들어가는 버터가 다 녹아버리기 때문에 반죽 온도에 신경을 써야 한다.



반죽기가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셰프를 부르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정확한 계량이었다면 일정 시간이 지나면 한 덩어리로 뭉쳐야 하는 반죽이 뭉쳐지지 않고 육안으로 봐도 질었던 것이다. 계란을 담당했던 친구가 칠판에 적어 놓은 배합표를 잘못 확인했던 것이라고 추측했는데 그는 자신은 맞게 계량했다며 억울해했다. 계란마다 다르지만 한 개가 보통 50g - 60g 사이다. 보아하니 계란 한두 개 더 들어간 게 아니었다. 그 친구를 나무라기 이전에 반죽을 정상적인 상태로 만들기 위해 셰프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밀가루를 작은 그릇에 들고 다니면서 6개 반죽기에 더 넣어줬다. 셰프는 원래 배합표에 계란과 밀가루만 더 들어갔으니 맛을 포함한 제품의 품질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미리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모든 반죽기가 멈추고 우리는 저울을 놓는 방법부터 정확한 계량의 중요성에 대해 셰프에게 예상에 없던 추가적인 교육을 받았다.



500g 버터가 2334g이 되버리는 마법.  이것때문이다.


배합표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재료의 특징과 그 재료들이 그 제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이후 정확하게 계량하는 것은 제과제빵에서 가장 기본이 되면서도 중요한 첫 단추이다. 여러 가지 변수에 능통하는 것은 첫 단추가 확실하면 변수가 당연히 줄어든다. 첫 직장에서 반죽을 쳤을 때 하루에 20kg 밀가루 포대를 평일 기준 7개씩 썼다. 그런 매장에서 오늘 같은 실수는 셰프의 방법으로 모면할 수가 없다. “직원의 실수로 오늘 브리오쉬는 맛을 포함한 제품의 품질이 오늘 문제가 있어요” 는 용납할 수 없는 문제다. 계란 양이 늘어난 만큼 모든 재료를 다시 계산해서 빠르게 집어넣던지 그마저도 너무 늦으면 어쩔 수 없이 다 버리던지 다시 계량해야 한다. 손실도 크지만 그런 날은 주방 분위기가 심각하다. 집에서 취미로 만드는 음식은 자신이 원하는 재료를 더 넣어도 되고 싫어하는 재료는 덜 넣어도 된다. 시각적으로 조금 부족해도 괜찮다. 실수가 달갑지 않지만 한 번쯤 계량 실수가 좋은 교육이 되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그들이 알았으면 한다. 우리는 취미로 제과를 배우려는 사람이 아니라 고객에서 정당한 금액을 받고 제품을 파는 프로다.






Mise en situaion


한국말로 '축소된 중간시험'이라고 보면 되고 영어로는 'simulation'이다. 12월에 있는 CAP 모의고사를 앞두고 한 달 동안 반복했던 제품을 각자 스스로 시간을 분배하고 만들어서 정해진 시간 안에 원하는 개수를 만들어서 진열까지 하는 것이다. 총 3가지 종류 - 개인별로 뺑 오 쇼콜라 8개, 크루아상 8개, 사과파이 6개, Religieuse (크기가 다른 슈를 눈사람 모양으로 붙여서 장식한 슈의 한 일종 ) 13개  -였다. 진짜 시험이 아니기 때문에 단체로 사용하는 몇 가지 재료는 셰프가 직접 준비해주기도 했고 축약되는 것도 많았으며 잘 모르거나 궁금한 것은 언제든 셰프에게 질문도 가능했다.


시험 전에 규칙과 일정에 대해 설명해주는 셰프와 긴장한 우리들


한국의 제과기능사를 합격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안에 크림을 넣은 마카롱 20개를 만드는 것이었다. 3번째 불합격을 통한 값진 합격이었다. 하루에 제품의 수량을 정하고 제품의 품질을 확인하고 내 결정에 의해 많은 것이 정해지고 책임을 져야 하는 시간을 보냈다. 직원들과 매장을 관리했지만 시험 앞에서는 여전히 긴장된다. 현장에서 만들던 제품 양과 더 많은 종류의 제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수 있을수 있지만 그런 생각으로 위안이 되지 않았다. 불어가 들리지 않고 머릿속은 온통 순서를 생각하고 있었다. 정해진 시간과 규칙은 엄청난 압박감을 가져온다. 전날 저녁에 시리엘에게 몇 번이나 공정과정을 확인했다. 결국엔 정리되지 않았다.



내 기억과 순간적인 상황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생각을 하고 움직이면 정확할 수 있지만 한 템포 느리다. 가끔은 몸이 상황을 기억하고 그것에 맡기는 것이 더 완벽할 수 있다. 한 제품에 매달리지 말고 전체를 보기로 했다. 평소에 잘 웃고 이야기하던 친구들이 모두 예민하고 사소한 것들에 서로 언성을 높인다. 지금은 경력자의 내가 필요했다. 침착하자.



몇명의 친구들이 사진 찍어간 내 마지팬 작품, 셰프의 칭찬까지 !




한 명당 35개씩 총 840개의 제품이 작업대 위에 모두 진열되어야 했지만 개수가 다 채워지지 못했다. 그리고 누군가의 제품은 까맣게 탄 채 진열이 되었다. 누군가는 화가 가득 나 있었고 누군가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몰아 쉰다. 모두 지쳐 보였다. 셰프의 전반적인 평가와 함께 24명은 모두 개별적으로 평가를 받았다. 며칠간 나를 신경 쓰이게 했던 크루아상 반죽은 결국 약간의 실수로 반죽에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지금까지 내가 만들었던 크루아상과 뺑 오 쇼콜라 중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제품이 나왔다. 셰프는 본인이 말한 문제들이 개선된 것에 대해 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역시 균일성에 높은 평가를 했다. 애플파이는 완벽해서 지적할 게 없다고 했고 처음 해보는 Religieuse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다음번에 충분히 개선이 가능한 것들이었다.



실수가 반복되는 것은 그것도 부인할 수 없는 실력이다. 심장이 시작할 때보다 더 강하게 뛴다. 아쉬운 부분도 많았다. 경력이 쌓여갈수록 잘못된 부분을 인정하고 부탁하는 것이 쉽지 않다. 수정하려고 시도했고, 셰프가 제시하는 해결책이 이해가 안 되면 스스로 찾아보고 프랑스 친구들에게 다시 쉽게 설명해달라고 부탁도 했다. 그것을 완수했다는 쾌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내가 만든 크루아상을 그 자리에서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파리의 어느 유명한 셰프가 만든 크루아상보다 더 맛있었다.



새까맣게 타버린 제품도 가지고 오라며 평가해주는 친절한 셰프

 

기계 없이 맨손으로 몇번에 걸친 수정으로 탄생한 제품




이전 05화 가지 같은 시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