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날의 우중 둘레길 산책, 14코스
서울둘레길은 서울 둘레를 쭉 걷는 코스이다 보니, 각 자치구를 지나쳐간다. 벌써 지나쳐갔거나 앞으로 지나치게 되어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매주 둘레길 걷는다는 이야길 했었는데, 그중 친구 한 명이 근처에 사는 친구가 있었다. 만약 자기 동네 둘레길을 걷는 차례가 오면 같이 걷거나 다 걷고 점심에 낮술이나 함께하자고 했었다. 그게 되게 먼 일 같았는데 어느덧 그 동네를 걸을 차례가 되었다. 그 친구를 포함해서 다른 친구까지 그 동네 친구들을 불러 약속을 잡고, 같이 걸을 타이밍은 안되어서 다 걷고 오면 근처에서 같이 낮술을 하기로 약속했었다.
그런데 지난 코스에서 예상치 못하게 부상을 입어 걷질 못했고, 낮술은 예정대로 진행했지만 둘레길을 끝내고 마시는 낮술이 아니라서 아쉬웠었다. 그리고 이제는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아, 올해 안에 둘레길을 다 걷겠다는 계획이라면 한 주라도 쉬면 일정이 더욱 빡빡해질 터였다. (이미 약간 불가능한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마침 본가도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고. 추석 당일에 이번 코스를 걷고 본가를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주도 쉬면 너무 오래 쉬니까. 추석 연휴에는 지독하게 비가 왔다. 조금 고민했지만 비가 세차게 내리지도 않고 (출발할 땐 그랬다..) 비 오는 날 걷는 경험은 어떨까 궁금해서 점심 때쯤 14코스로 출발했다.
모자나 우비 없이 우산만 들고 둘레길로 나섰다. 동쪽에 사는 나로서는 거의 가장 정반대 쪽 코스라 이미 그 코스 출발선으로 가는 것만 한 시간이 넘었다. 서울을 가로질러 구일역으로 향했다. 역시 추석이라 동네는 정말 한적했다. 원래도 내가 걷는 길, 내가 걷는 요일은 대체로 한적한데, 이 날은 도심에 나밖에 안 남겨두고 다들 떠난 느낌이었다.
14코스도 13코스처럼 평탄한 안양천길인데, 다른 점은 14코스는 흙길이 많다. 더군다나 지난 코스에서의 교훈으로 등산화를 장만한 내게는 더 이상 발은 아프지 않았다. 어릴 때 근처에 살았던 터라 안양천이 벚꽃길이 예쁘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단풍 시즌도 벚꽃 시즌도 아니었지만 그냥 초록빛 나무가 우거진 것만으로도 좋았다.
14코스의 가장 특이점은 이제까지 코스들과 다르게 황톳길이 정말 많다는 것인데, 코스의 거의 70%는 황톳길이 함께 구비되어 있었다. 아, 날씨 좋을 때 왔음 황톳길을 걸어봤을 텐데.. 이렇게 본격적으로 구비된 황톳길은 좀 더 걷는 맛이 있을 것 같았는데 비 때문에 이미 황톳길이 엉망이었다. 그런데 몇 명 대단한 시민들이 흙탕물이 된 황톳길을 꿋꿋이 걷고 계셔서 조금 놀랐다. 황톳길은 단지 조성해 두면 끝이 아니라 섬세한 관리가 필요하다던데 꽤나 발건강에 신경 쓰는 자치구이군. 지난 둘레길을 여러 차례 걸어본 결과 어르신들은 일반 산속에서도 맨발로 걸을 정도로 맨발 걷기를 사랑하셨는데, 이번 둘레길은 평상시에 어르신들에게 인기가 많겠다고 생각했다.
우산을 몇 시간째 들고 있으니 점점 팔 뿐만 아니라 어깨까지 뻐근했다. 우비 입고 올걸... 비가 오니 빗소리나 비 냄새는 좋았지만 풍경을 맘껏 감상하지도 못하고 흙탕물도 곳곳에 있어, 고된 걷기가 진행되었다. 다음엔 비 오면 안 나오거나 우비 입어야지. 그렇게 예쁜 안양천 길을 걷다가, 염창동으로 빠질 때쯤 안양천 합수부를 지난다. 여긴 하천변이 아니라 한강변이었는데 낚시하는 사람들도 있고 뭔가 내가 아는 한강이 아니라 진짜 여행 가서 만나는 강 같은 느낌이었다. 냄새도 강 냄새, 소리도 방파제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니까 갑자기 바다에 온 느낌이었는데 비만 안 왔으면 그 풍경도 꽤나 좋았겠다. 이 날은 비도 오고 습하고 날이 너무 흐려서 스산했다. 그래 그 느낌이 맞다. 스산하다.. 그곳엔 러닝 하는 청년들이 조금 있었고 역시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긴 비 오는 추석에 누가 여길.. 둘레길을 걷는 내내 주변 공원, 안양천, 경기장 등 어디를 둘러봐도 텅 비었는데 항상 바글대던 서울이 텅 비어버린 느낌이 굉장히 이상했다. 기분이 나쁘고 좋고를 떠나서 뭔가 도시가 쓸쓸하고 황량한 느낌도 나고.
그렇게 도착한 종착지 가양역. 이 동네는 처음 오는 곳이었다. 항상 초밥을 좋아하긴 하지만 유독 이 날은 바다 같은 한강을 지나서인지 초밥을 먹고 싶었는데 가려는 곳들이 추석 당일이라 닫거나 아직 열기 전이었다. 애매한 시간에 도착한 나는 조금 갈등하다, 고민하기엔 너무 지쳐버린 몸을 이끌고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부모님 집으로 돌아와 가방을 열어보니 가방 안이 전부 젖어있었다. 내 기력도, 내 가방도, 도시도 어딘지 모르게 축축했던 우중의 둘레길 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