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숲, 바람이 기분 좋았던 15코스
전날 조금 늦게 잔 터라 11시쯤 일어나 정오에 슬슬 집을 나섰다. 다음 날은 또 비가 온다고 해서 오늘은 일요일의 둘레길을 걷는다. 달콤했던 3 연속 초보자 코스는 오늘로 끝이다. 이제 다시 산길 못 걷는 거 아냐?라는 맘도 들면서 한 여름의 산길을 겪었는데 가을 산길 못 걷겠냐는 마음으로 15코스를 걷는다.
이날은 워낙 코스 길이도 짧고 도심 속 코스라 모처럼 가방도 안 매고 바람막이 입고 주머니에 소지품을 넣고 맨몸으로 나선다. 나는 휴일에 이렇게 아무것도 들지 않고 슈퍼 나가는 백수처럼 돌아다니는 걸 좋아한다. 백수처럼 돌아다니기의 장점은 내가 정말 한량 같이 느껴져서 좀 더 행동에 제약이 없고 자유롭다. 이곳저곳 기웃거리고 할 일은 없고 시간은 많은 사람처럼 다녀도 이상하거나 수상하게 보지 않고 '할 일 참 없나 보다'라고 여겨지는 느낌이다.
이번 코스가 반환점이다. 가양역에서 가양대교를 건너 이제 위로 간다. 6코스에서 다리를 건너며 시작해서 밑을 쭉 훑었고 위로 갈 때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어릴 때부터 늘 강 위쪽에서 놀았기 때문에 위쪽이 훨씬 익숙하고 좋아하는 곳들도 많다. 물론 도심 속을 걷는 건 아니지만 둘레길을 다 걷고 뻗어나갈 곳들이 많다. 어느덧 반을 돌았구나, 실감한다. 살면서 늘 걷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많은 다리를 건너봤는데, 맨 처음에 걸었던 광진교였나, 그 다리 빼고는 사실 특별히 예쁘거나 걷기 좋은 다리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아, 밤에 걸으면 한강이 좀 예쁘긴 하지만. 오늘도 날이 흐렸기 때문에 한강 풍경이 그리 멋지진 않았다. 가을이 와서 너무 좋은데 왜 이리 가을비가 내리는지. 비 내리는 것보다 하늘이 흐린 게 아쉽다. 일요일은 대체로 둘레길에 사람이 좀 있는 편이다. 그리고 보통은 부부들이 많은데, 중년 부부들이 많아서 여러모로 편안함을 준다. 그래, 결혼하고 나이 들어서도 저렇게 사이좋게 둘레길 걸을 수 있구나. 이 날도 부부들과 그 사이에 낀 한량인 나. 이렇게 둘레길을 걸었다.
가양대교를 건너고부터는 공원길이다. 자연의 산길과는 또 다른, 사람이 가꿔둔 곳이긴 하지만 깔끔하고 걷기 좋다. 나무들이 굉장히 많고, 왠지 모르게 예쁘다. 그러니까, 당연히 자연은 예쁜데, 이제까지 둘레길들도 가로수가 쭉 늘어진 길은 많았는데, 여기가 잘 꾸며둔 건지 뭔가 더 정돈되어 있고 좋았다. 이날은 비도 안 오고 대신 시원한 바람이 부는 날이었는데 그 바람이 너무 좋더라. 딱 춥기 전 시원한 가을바람. 나무 냄새도 좋다. 너무 평화롭다. 이 길, 마음에 드는 둘레길로 등극했다. 계속 사진을 찍기 위해 멈춰 선다.
메타세쿼이아길이 등장했다. 자치구에서 열심히 심어놓은 약간의 인공적인 느낌은 나지만 그럼에도 좋다. 곧게 뻗어 이어지는 나무들. 그 앞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 사진 찍는 모녀들을 보니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도 이 길 아나? 이 길 걸어봤나. 다음에 같이 와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엄마도 가로수길 좋아하는데.
이 코스는 특이점을 말할 것도 없는 게, 그냥 자연이 너무 좋다. 누가 걸어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길이고 나뭇잎이 노랗게 될 즈음에 오면 더 좋겠다. 덧붙일 코멘트도 없다. 좋다. 날씨도 좋고, 자연도 좋고. 더 걷다 보면 문화비축기지를 마주한다. 늘 이 이름이 의아했는데, 영어로는 오일 탱크 컬처 센터인가 그렇다. 비축이 문화를 비축한다는 뜻이 아니라 오일을 비축한다는 의미였나. 광활하다. 이곳에서 공연이나 문화 이벤트가 이뤄지나? 쾌적하다. 안까지 들어가진 않았다. 궁금했는데 이 코스 덕분에 걷게 되는군.
그렇게 걷다 보면 월드컵 공원이 나오고 그곳이 워낙 커서 리본을 놓쳐 이상한 곳으로 흘러갔다. 둘레길은 리본을 놓쳐도 최종 목적지의 방향을 알면 다시 돌아오기 쉽다. 불광천길로 내려간다. 코스 마무리는 불광천 걷기로군. 불광천은 전에 왔을 때에도 참 평화로운 로컬 공간이었는데 이날도 가족들이 많았다. 내내 비 오다 이 날만 안 왔으니까. 불광천은 저 멀리 보이는 산이 참 멋졌는데 무슨 산이지. 검색해 보니 북한산이다. 아 저 산 멋지네. 이날은 친구도 근처라 점심을 먹기로 해서 만났는데 다음 코스를 같이 걷자고 하길래 찾아봤다. 아.. 9코스 이후로 오랜만에 맞이하는 상급자 코스다. 산을 네 번을 오르내린다는데 너무 무섭다. 솔직히 이런 힘든 코스는 그냥 혼자 걸으면서 욕하면서 나 혼자 조용히 걷고 싶기는 한데, 일단 같이 걷기로 약속했다. 16코스를 걸을 땐 좀 더 가을이니까.. 좋을거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