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만취의 17코스를 조심하시오.

참새의 방앗간이 있는 17코스

by 젊은 느티나무

지난 상급자 코스를 무사히 끝내고, 그래 다시 걸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구파발로 향했다.

참 멀다. 은평구에 대체 몇 개월째 찾아오고 있는지. 벗어나질 못하네. 이번 17코스는 '하늘과 맞닿은 길'이라는 수상한 제목을 가진 코스다. 하늘과 맞닿고 싶지 않아..


구파발에서 출발한다. 시작은 탄천길이다. 아, 역시 난 탄천길이 잘 맞아. 걷기도 쉽고 그러면서 은근 도시 구경도 하고. 날 좋은 날, 평화롭고 산뜻하게 탄천길을 걸었다. 그러다 곧 다시 올라가는 길이 나왔는데, 어쩜 이 동네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엄청 고요해서 내 숨소리만 들리는 수준으로 차도 사람도 없다. 평화로움 그 자체의 도시가 있었다니. 아무래도 많이 올라와서 그렇겠지만. 대부분의 행인들도 모두 어르신들이 많다. 은퇴하고 나중에 이렇게 한적한 도시에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산길이 나오긴 했는데 정말 동네 뒷산 느낌이라 맑은 공기 마시며 정말 산뜻하게 걸었다. 사실 이번 코스는 소요시간이 짧길래 물도 따로 안 챙기고 가방 자체를 안 가지고 주머니에 손만 찔러 넣고 나왔다. 마음도 산뜻하고 몸도 산뜻하다. 난이도도 평이하다. 어려운 구간도 없고 산책하듯이 가볍고 경쾌하게 걷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산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는데, 뭐랄까. 홍상수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걸을 법한 풍경이다. 내게 '홍상수 영화에 나올 법한 장소'라는 표현은 굉장한 극찬인데 고즈넉하면서도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이 지루하지 않은 풍경이라는 이야기다. 이 뒷산이 딱 그러했다. 그렇게 아주 아주 고요하고 공기도 왠지 맑은 이곳을 가볍게 걷고 내려와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데, 코스를 2/3 정도 걸었을 때쯤 어떤 카페 같이 생긴 공간이 나타났다. '생맥주 맛있는 집'이었나, 이런 비슷한 등산객을 자극하는,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현수막을 단 가게였다. 이제까지 한 번도 둘레길을 가다가 옆으로 샌 적은 없었는데 여기는 둘레길 가는 길 중간에 있어서 길을 새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위치에 있는터라 잠시 고민했다. 이때가 딱 오후 한 시라 낮술하기에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고 맥주 한잔만 마시고 갈까, 싶은 맘에 가게로 들어섰다.


가게는 가로로 긴 형태, 그리고 한쪽면이 통창으로 되어 있어, 손님들은 대체로 바깥 풍경을, 그러니까 보통은 본인이 내려왔을, 아님 올라갈 산을 보는 구조로 되어있다. 이 또한 홍상수 영화스러운 장소라, 이 앞에서 술잔을 기울일 주인공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음, 술맛이 아주 좋을 것 같은 장소로군. 생각하며 들어서자마자 생맥주를 시켰다. 물을 안 가져가서 목이 타기도 했다. 가게에 손님이 나뿐이라 맥주를 마시며 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길 나눴다. 둘레길을 걷다 잠시 들어왔다고 했고, 사장님은 아차산 둘레길이 그리 좋다는 이야길 했다. 그러다 사장님 부부 (내 추측.. 아닐 수도 있음)께서는 식사 시간이셨는지 나와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서 뭔가 식사를 하시기 시작했다. 나는 오히려 그 자유로운 분위기가 좋아서 맥주를 홀로 조용히 먹고 있었다.


마침 내가 며칠 전부터 원래도 좋아하던 와인에 좀 본격적으로 빠져, 와인에 미친 시기를 보내고 있었고, 맥주를 마시면서도 와인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와인에 대해 검색하고 있었다. 그러다 사장님이 잠시 식사 쉬는 시간이셨는지 다시 대화가 시작 됐고, 없을 줄 알았는데 와인을 팔고 계셔서 하우스 와인 한 잔을 주문해서 마시게 되었다. (1:40pm)


보통 하우스 와인은 저렴하게 마실 데일리 와인을 제공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가게마다 달라서, 사장님이 생각하는 괜찮은 데일리 와인을 먹어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사장님이 술에 진심일 경우에) 그런데 보통은 무난한 저렴한 와인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리 맛있기는 쉽지 않은데, 이곳의 하우스 와인(레드)은 맛있었다. 오, 이 와인이면 나도 데일리로 마시기 좋겠는 걸. 사실 따라주실 때부터 기분이 좋았는데, 사장님이 기분이다! 의 느낌으로 와인잔 가득 와인을 따라주셨기 때문이다. 부드럽게 넘어가는 와인을 콸콸콸 마시는데, 삿포로에서 사 오셨다며 작은 치즈를 내주시는 것이 아닌가.. (2:00pm)


내가 가게를 가서 가장 좋아하는 경우는 사장님이 판매하는 상품에 진심인 경우다. 커피든, 맥주든, 술이든, 음악이든.. 그런 곳은 취향이 갈릴 지언정 실패할 확률이 드물고 사실 취향도 안 갈린다. 사장님이 전문가이기 때문에 알아서 맞춰준다. 술을 꽤 즐기시는 듯한 사장님이 마침 적절한 안주를 주시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있나. 너무 맛있다고 이야기하면서, 그럼 이 집의 화이트 하우스 와인은 어떨까 궁금해졌다. (사실 이때 멈췄어야 하는데) (3:00pm)


화이트 와인을 또 한 잔 시킨 시점, 사장님 부부는 와인과 함께 소고기를 구워드시기 시작했는지 나에게도 몇 점을 주셨는데 간이 기가 막히게 잘 맞았다. 간이 기가 막히게 맞는 소고기와 오이장아찌를 먹으며 당연히 화이트 와인도 맛있었고 이 가게를 들어선 지 두 시간이 지났고 난 이미 세 잔을 마셨다는 사실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화장실을 갔는데 얼굴이 빨갰다. 그렇지만 술 마시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이때부터는 내가 마시는 게 아니다. 술이 술을 마시는 거다.


와인 이야기를 또 한창 하니, 사장님이 아예 그러지 말고 우리랑 같이 마시자고 자리를 내어주셨고, 감사하게도 구워주시는 고기를 받아먹으며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고, 정신 차리니 지하철이고 시간은 여덟 시쯤이었다. 다행히 구토감은 없었는데 굉장히 졸렸고 보랏빛 입술로 지하철에서 헤롱대는 나를 보고 어떤 어르신이 자리를 내어주시려고 할 정도였다. 근데 아무리 가도 집이 안 나온다. 취해서 자꾸 순환선을 도는 거다. 겨우 정신 차려서 집에 도착했고, 씻고 잠들었다.


다음 날 결제 내역을 보니 거기서 나온 건 다섯 시 반쯤.. 거의 두 시간가량을 사장님 부부와 마신 모양인데 어떤 추태를 부렸을지 너무 끔찍했다. 마시기도 엄청 마셨을 텐데 돈도 별로 안 받으셨네.. 다음날부터 와인이 내게 남기고 간 소화불량과 숙취가 낫질 않아 며칠을 시름시름 앓고 와인 사랑병이 약간 치유됐다. 한동안 와인이 꼴도 보기 싫었는데 지금은 그 정돈 아니지만 전만큼 와인에 미쳐서 찾아다니지 않는다. 걸리자마자 치유되어 버린 와인 사랑병.. 그리고 중간에 끝나버린 17코스. 도대체 난 거기서 무슨 짓을 벌였던 걸까... 다음 주에 끊겨버린 그곳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그 앞을 창피해서 어찌 지나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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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하기 상태로 그대로 집까지 가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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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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