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산책으로 다시 돌아와서
지난 둘레길의 여파로 무엇을 먹든 내내 소화가 안 되는 몸을 이끌고 한 주를 보냈다. 다시 휴일이 되었을 때, 그냥 그때 못 걸은 길은 살짝 패스하고 바로 다음 코스로 갈까, 잠시 고민했다. 얼마 남지도 않았던데 안 걸어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그것보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민폐를 끼친 것 같았다. 기억을 잃은 약 두 시간의 시간 동안 뭘 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사장님 부부의 고기를 집어먹고 술을 따라 마셨을 거다. 술이 취했으니 혹시 장난이랍시고 선 넘는 말을 하지는 않았을까? 이제 집에 갔으면 좋겠는데 버티고 있지는 않았을까? 술 취해서 무언가 엎지르고 깨부순 건 아닐까?... 다시 만났을 때 어색한 사이인 사람이 이 지구 어딘가에 있는 게 찜찜하다. 워킹홀리데이가 끝나고 돌아갈 때 집을 제대로 원상복구 해두지 않아서 얼굴 붉히며 이야기 나눴던 한국인 호스트 부부 언니오빠가 10년이 지난 아직도 그 얼굴이 생각나는 것처럼. 게다가 심지어 내게 잘해준 분들일 경우엔 더더욱! (못해준 사람이면 찜찜하지도 않겠지)
귀찮다고 덮어두기엔 나도 어른인데 그러면 안 된다. 친구가 추천해 준 구움 과자 맛집엘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찾아갔다. 오직 이 과자집만을 위해서. 주변에 디저트에 진심인 친구가 추천해 준 곳인데 11시 반 오픈인데 40분에 도착했음에도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이곳이라면 내 감사와 사과를 전하기에 좋겠어. 다짐하고 선물세트를 사들고 다시 길을 나섰다.
근처에 도착하니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아 맞아 이런 길이었지. 가게가 저 멀리서 보인다. 괜히 긴장된다. 설마 내게 화나있으신 정돈 아니겠지 설마. 점점 가게가 가까워졌을 때쯤. 뭐지. 문이 닫혀있었다. 지난주 같은 시간엔 분명 열려있었는데. 어쩌지, 하다가 바로 옆 카페에 들어가서 펜을 빌렸다. 쪽지라도 써서 문고리에 걸어둘 양으로. 그런데 그 카페 사장님도 친절하신 게 이야기를 잠깐 했더니 펜과 종이를 빌려주시곤, 주인 분들께서 돌아오시면 맡아놨다가 전해주신단다. 하, 이 동네 사람들은 다 왜 이리 친절하신지. 감사한 맘에 커피라도 사들고 나왔으면 좋았겠는데, 마저 산을 올라야 해서 차마 그러진 못하고 선물만 맡기고 나왔다. 그래도 마음이 조금 놓인다. 혹시라도 17코스를 걷거나 북한산에 이 근처부터 가시는 분들이 있다면, 이 친절한 사장님 부부가 계신 '소소'라는 술집 겸 식당에 들러보시길. 산을 바라보면서 마셔서 과음할지도 모르지만 정신은 잘 붙잡으시고.
그렇게 가벼워진 마음으로 못다 걸은 길을 나섰다. 남은 길은 알고 보니 북한산 둘레길이었다. 본격 산행에 약간 당황했지만 일단 걸었다. 그런데 더 걸으니 더 당황스러웠는데, 그간 눈이 쌓여서 눈길이 되어있는 거였다. 나는 타고난, 유명한 겁쟁이로, 눈길, 빗길, 미끄러운 길에서는 아무것도 못하고 갓 태어난 고라니처럼 걷는 인간이다. 실제로 몇 차례 넘어진 적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사실 그런 것치고 큰 사고 난 적은 없는데도 그렇다. 유전인가? 특히 눈이 내린 산을 걷는다? 이건 내 사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엄청나게 당황했다. 그런데 이미 돌아갈 수도 없어서 일단 걸었다. 꽁꽁 언 빙판길까진 아니고 살얼음 슬러쉬 정도의 눈길이었다. 새로 산 등산화의 힘을 믿어보자. 아이젠 찬 것처럼 발을 땅바닥과 수직으로 하고 터벅터벅 걸었다. 더 무서웠던 건 여기가 그리 위험하거나 어려운 길이 아니라 그, 뭐라 하지 등산로가 굉장히 뚫려있었는데, 만약에 내가 길에서 미끄러져서 이 옆으로 빠져서 낭떠러지로 떨어지면 어떡하지?라는 상상 속에서 벌벌 떨며 걸었다. 신이시여. 이건 내 예상에 없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앞으로 걸을 길이 모두 북한산 둘레길인데, 분명 이렇게 눈이 다 녹지 않은 구간이 있거나 아님 겨울 내내 또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이제 어쩌지. 봄이 될 때까지 또 무기한 연기인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눈길을 걸었다. 아까 과자점에서 내 몫으로도 휘낭시에를 한 개 사두었는데, 도중에 먹었다. 맛있네.
남은 길은 2킬로 남짓이라 금방 끝났다. 사실 눈길이 아니었다면 더 일찍 끝났을지도 모른다. 겨우겨우 내려와서는 드디어 해방되긴 했는데. 얼마 걷지도 않은 터라 이대로 집에 가긴 아쉽고 그래서 일단 근처 카페에 들렀다. 동네 사랑방 같은, 로컬 카페를 가고 싶다면 로스터리나 커피 공방이라는 이름의 카페를 찾아가시라. 외관이 세련되지 않고 수공예 느낌이면 더 좋다. '불광커피공방'에 들러 사장님이 내려주신 핸드드립을 마시며 멀뚱멀뚱 고민했다. 어디를 갈까. 이 근방은 아는 데라고는 미술관이나 도서관인데 모조리 휴관일이다. 문화와 예술이 죽은 요일, 월요일. 갈 곳도 없고 돈도 더 쓰고 싶지 않고, 술도 마시고 싶지 않다. 3호선 따라 쭉 걷기로 했다. 쭉 뻗은 길이라 따라가며 동네 구경하기 좋을 것 같다.
역시. 난 도시를 걷고 싶은 거였어. 도시는 살아있다. 지나가는 사람들, 차들, 상점들. 동네 분위기도 물씬 느껴진다. 월요일부터 다들 시장에서 장을 보고 바삐 움직인다. 홍제역. 가장 사람이 많다. 붐빈다. 시장이 활기차다. 아, 난 역시 이걸 느끼고 싶은 거였어. 산을 걷고 싶은 게 아니라.
좋은 생각이 났다. 나머지는 도심을 걸어서 돌아오자. 서울둘레길 이런 거 이제 그만하고. 나만의 둘레길을 걸어보자. 안 걸어본 길을 걷고 안 걸어본 동네를 가보자. 궁금했던 상점들도 죄다 들릴 수 있는 코스로 짜보자. 갑자기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눈길 무서워하지 않고 12월에도 1월에도 걸을 수 있겠어.
다음에 또 마음이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서울둘레길일수도 있던 17코스 끝. 여러모로 마음이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