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벤더를 닮은 여인
지난번에 썼던 색깔 있는 남자에 이어 이번엔 색깔 있는 여자다. 어째 , "색깔 있는 여자"란 어감은 색깔 있는 남자보다 강한 느낌이 든다. 야릇한(?) 여인을 상상한다면 곤란하다.
앞(색깔 있는 남자)에서 언급했듯이, 난 여자를 볼 때, 역시 얼굴보다 전체적으로 와 닿는 느낌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여자의 분위기는 상당히 다양하다. 요목조목 눈여겨보면 재미있다. 눈웃음을 연일 짓고 , 다정함으로 가득 찬 해바라기 꽃 같은 사람, 도도해 보이지만 속 깊은 정이 있는 은근파에서, 말 한마디 붙이기 힘든 냉정파, 슬픈 가을 같은 느낌을 지닌 사람 등 제각기 너무 다르다. 모두가 섬세하고 깊은 표정이 있는 색깔들을 입고 있다. 이런 이유로 여자에게 색깔을 매기는 일은 남자보다 좀 복잡하다.
그래서인지 여자들에게 대놓고 "어머, 자주 색깔 같아요!” 하는 색깔 매김은 조심스럽다. 대개는 속으로 색깔 매김을 하는 편이다. 주로, 스스럼없는 친구에게 재미 삼아 "너에겐 이 색깔이 맞아~"하면서 어쩌고 저쩌고 한다. 뭐, 퍼즐 맞추기 게임같이 말이다.
“자기만의 컬러가 있는 여인!"은 왠지 듣기에도 좋지 않는가. 여자에게 있어서 색깔이란 어릴 때부터 조금씩 변하는 성격처럼, 나이가 들면서 “매력” “개성”으로 만들어지는 자기만의 분위기다. 어쩜 살아온 삶이 그대로 스며들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나이 들수록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나. 참 어려운 숙제 중의 하나같다. 내가 느끼기엔, 그 말은 주름 하나 없는 팽팽한 예쁜 얼굴이 아니다. 바람과 폭풍 속을 견뎌낸 들판에 핀 초연한 풀잎 같은 모습이거나 성숙하고, 온화한 미소를 가진 얼굴로 늙는다는 뜻이 아닐까. 아름답게 늙는다는 것이란 이런 얼굴을 가진 여인일 것 같다. 아무튼 나의 해석은 이렇다
이런 여인의 얼굴과 닮은 색깔이 있다. 진보라색으로 변하기 직전의 옅은 색깔의 라벤더(Lavender)다. 재작년 프로방스를 여행하면서 라벤더를 보기 위해 발렌 솔(Valensole)을 들렀다.
넓은 필드를 가득 메우고 있던 라벤더를 본 순간, 그만 푹 빠져버렸다. 강한 여름 태양과 바람아래 흔들리며 길게 늘어진 보라색의 꽃잎들이 물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너무 아름다웠다. 독특한 향과 가늘고 긴 자태가 무엇보다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아, 라벤더 색깔을 입고 싶어!" 하고 혼자 중얼거리듯 소리쳤다.
두 시간가량을 그곳에 머물렀다. 라벤더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내 나름대로 탐색(?)하면서 꽃에 마냥 빠져보기는 처음이었다. 8월쯤이면 짙은 보라색으로 물들기직전이 었다.
연 보라색의 라벤더는 순수함과 우아한 자태를 가졌다. 무언지 애잔한 슬픔이 담겨있다. 짙은 향에서 나오는 강인함과 애처로울 정도의 아름다운 매력이 스며있는 색깔이기도 하다. 느낌이 참 다양하다.
라벤더 색깔의 여인 하면, 프로방스 여행 중에 우연히 본 할머니 한분이 기억이 난다. 딱 라벤더 색깔을 그대로 입고 있는 분이었다.
엑상 프로방스(Aix en Provence)에서 세잔의 아틀리에를 들른 뒤, 근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가게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할머니 한분이 내 눈에 확 들어왔다. 바람에 흩날리는 앞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넘기고 있었다.
대략 60대가 훨씬 넘어 보였다. 그녀는 홀로였다. 희끗희끗 한 머리는 흘러내리듯 자연스럽게 하나로 묶었다. 예쁜 꽃핀을 한쪽에 살짝 꽂고 있었다. (프랑스 할머니들의 머리스타일은 딱 두부류인 것 같다. 짧은 커트 아니면 올린 머리다) 주름이 가늘게 진 맑은 얼굴이었다. 갸녀린 몸매에, 하늘거리는 연녹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너무 잘 어울렸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대나무로 만든 큰 여름 백을 들고 있었는데, 거기엔 이름 모를 예쁜 꽃들이 담겨있었다.
“일요일인데, 할머니는 여기까지 혼자 여행을 온 걸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난 대놓고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어쩌다 눈이 딱 마주쳤다. "웬 동양 여자가 자기를 뚫어져라 보는 거지?" 하며 내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아~죄송해요~ 너무 쳐다보아서.. 멋지세요~" 하며 속으로 중얼거리며 살짝 웃었다. 그녀는 마치 답례를 하듯 수줍은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순수함과 우아함이 담긴 모호한 아름다움이 있는 할머니, 아니 여인이었다. “아, 그림처럼 예쁜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 할머니는 막 도착한 버스를 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였다면 (사실, 후배는 내가 할머니를 감상하는 동안 내내 사진 타령을 하고 있었다.) 나서서 말을 걸어 보았을 것이다. 동행이 있다는 건 , 어떤 땐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는 말은 정말이지 이런 때 쓰는 말이었다.
프로방스를 여행하면서 라벤더가 좋아졌다. 그 후로 라벤더를 보면 그 할머니가 떠올랐다. 라벤더에 관련된 것이라면 샴푸, 향수, 심지어 라벤더가 그려진 주방용품까지 이것저것 사는 일이 생겼다.
연 보라색의 라벤더는 내가 나에게 입히고 싶은 색깔이기도 하다. 이런 색깔로 나이 들고 싶다. 너무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고운 멋이 있는. 훗날, 누군가가 나에게 “아, 라벤더를 닮으셨네요~”해 주었으면 정말이지 좋겠다. 그 색깔을 입으려면 좀 더 세월이 흘러야겠다.
그나저나 , 저요? 무슨 색깔이냐고요? 사실, 저도 한 색깔(?)한다네요.. 저희 집의 한 남자와 여자 말로는 회색에다 보라색이라네요. 뭔지 칙칙하고, 수수께끼 같은, 요상(?)하고 이상한~ 뭐, 그렇답니다.
함께 나누는 좋은 영화
Little Women-작은 아씨들/ Netflix, Amazon Movie (2019)
글쓰는 여자, 톰보이같은 주인공- Jo와 그녀의 세 자매의 성장을 그린 영화/Louisa May Alcott 소설을 영화한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