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때, 결혼하는 때
지난달, 주말이었을 거다. 늦은 밤이었다. 느닷없이 한국에 있는 대학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티비에서 미국의 코로나 사태가 점점 심각해진다는 뉴스를 보고 바로 내 생각이 났다고 한다.
"언니! 별일 없지?"
"음, 지금은 괜찮고!, 나중은 모르겠네~"라고 우스개 소리로 대답했다.
이런저런 몇 마디를 주고받으면서 느낀 건, 보통 때보다 한결 부드럽게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다소 들떠 있었다. 웬걸, 조금 뜸을 들이더니,
"나, 결혼할 사람이 생겼어!" 하는 게 아닌가.
"정말? 근데, 그 나이에 결혼을 하려고?"라고 나도 모르게 뚝 맞은 소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선뜻 "축하한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이고~ 이제 가끔 동행할 여행 짝꿍이 없어졌네"라는 심술궂은 생각도 들었다.
"그 무덤을 왜 기어코 들어가려고 하냐, 그냥 맘 편하게 혼자 살아!라는 등의 말이 입안에서 다시 맴돌았지만 대놓고 한다는 건 너무 경박스러울 것 같았다. 결혼에 대한 무시무시한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일단 입을 다물었다. 막 동생 같은 그녀라고 귀에 거슬리는 말을 계속해서는 안될 성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결혼한다니 대단한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그녀와 나는 대학교 때 몇 년간 함께 자취생활을 했다. 지지고 볶고 하면서 지금까지 허물없이 지내는 언니, 동생 같은 사이다. 20년이 넘은 친구이면서 나의 여행 짝꿍이기도 하다. 그런 고로 우리는 서로 너무 잘 알고 있는 사이다. 나에게 본인의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건 가족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것처럼 고맙고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한때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지만 인연으로 엮어지지 않았다. 그 후로 연애다운 연애한 번 못했다.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이제까지 화려한 싱글로 잘 지내왔다. 앞으로도 씩씩하게 늙어갈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솔직히 그러길 바랬다. 남의 속사정도 모른 채, 고고한 싱글로 살면서 나랑 죽 맞는 여행 짝꿍이나 하면서 늙었으면 했다. 마치 늙어가는 홀 엄마가 나이 든 딸이 결혼 같은 건 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친구처럼, 가이드처럼 곁에 있어주길 바라는 이상한 심보처럼. 나의 마음이 딱 그랬다.
"도대체 얘가 어떻게 연애를 했담? 궁금증이 일어 막 질문을 던졌다. 의례히 던지는 여자들의 질문들이란, 얼굴 생김새부터 언제, 어디서, 어떻게 등등.. 그 의문의 사내의 정체를 캐묻기 시작했다.
"언니, 사진 보고 얘기해!" 하며 한술 더 뜬다. 카톡으로 단번에 여러 장의 사진을 보냈다. 내게 무슨 감정의뢰를 하듯 나의 반응을 궁금해했다. 그님의 사진을 놓고 서로 이러쿵, 저러쿵, 다방면으로 뜯어보고, 재고를 반복했다. 조그만 사진을 있는 대로 확대해서 눈가의 주름부터 눈동자까지 세밀하게 관찰했다.
근데, 내가 뭘 알겠나? 20년 가까이 살아온 남편과 나도 지금까지 서로에 대해 " 정말, 이상해!" 할 때가 있는데, 사진 속의 그 사내가 아무리 훤칠하고, 혹은 그럴싸 해 보인들 어떻게 알 수 있겠냐 말이다.
대충,”뭐~ 이만하면 됐어!" 하는 것도 동생 같은 그녀에게 너무 무성의한 것 같고, "어째, 얼굴에 기름기가 너무 많아 느끼해 보여~" 이런 말도 기를 죽이는 것 같고. 아무튼 뭐라고 딱히 적당한 말 한마디가 생각나지 않았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냥 혼자 살아!" 하고 싶었다. 사실, 그녀의 언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결혼이란 상대방에 대해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고, 깜쪽같이 몰랐던 부분들을 하나씩 들키면서 사는 것이 아닌가. 주사기를 던져 내가 원하는 행운의 숫자를 기대하는 것과 같은, 일종의 모험이라는 배에 오르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이런 구구절절 설명에 그녀는 "음음. 그렇지, 그 말도 맞네, 그려~"라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듯했다.
내가 물었다.
“ 너, 그 사람, 사랑해?”
“ 글쎄,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그냥 편안해~”라고 말했다.
그녀가 결혼을 하려는 큰 이유는 외로움 때문이라고 했다. 혼자 짊어지고 갈 생계문제도 있을 것이다. 재작년 프랑스 여행을 함께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한 번도 그런 기색이 없었다. 죽을 때까지 홀로 살 것같이 자신의 싱글라이프를 자랑스러워했으니까. 내가 부러울 정도로 당당한 싱글녀, 자유인이었다.
그녀가 오래전부터 혼자 사는 편안함에 외로움 따윈 잘 감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근데, 나이 들수록 외로움이 너무 싫다고. 그것이 결혼을 결심한 이유라고 한다.
글쎄, 그 외로움이란 “ 결혼을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둘이라는 존재감 때문에 순간순간 숨어버리는 거야, 결혼을 해도 외로움은 있어”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눈부신 햇살에도, 비 내리는 날에도 문득문득 가슴 한 곳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다. 외로움이라는 것이 말이다.
단지 외로워서가 아니라, 사랑할만한 자신이 있으면 결혼해!”라고 덥석 한마디 던졌다.
그녀 말대로 나이가 들수록 결혼을 하고 싶은 이유가 외로움도 한몫을 하지만 경제적인 문제도 있기 때문이다. 타산적인 것을 분명 따지고 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경제적인 문제에 당장 부딪히면 견디지 못하고 헤어지는 경우를 주위에서 많이 보았다. 그런 게 걱정이 된다.
이런 이유로 동생에게 다그치듯 , "사랑할 자신이 있냐?" 고 거듭해서 물어본 까닭이다.
그건 그렇고, 뉴올리언스에서 박사 공부를 하고 있는 대학 친구가 있다. 대단한(?) 노처녀다. 공부만 하다가 나이 들고 있는 중이다. 눈은 높아서 웬만한 남자는 눈에 차지 않는다. 독신녀는 아니다. 자칭 열정적인 로맨티스트다. 간혹 재미 삼아 이 친구에게 확인을 하는 게 있다. "너, 아직도 결혼할 생각하고 있어?" 묻는다. 친구의 대답은 바로 "예스"다. 그럴 때마다 맙소사!라는 말이 그냥 나온다.
이 친구가 대학교 때부터 외치는 결혼에 대한 지론이 하나 있다. “하루를 살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살 거야!”다. 비록 내일 전쟁이 터지더라도 오늘 하루 사랑을 하다가 죽겠다는 뜻이다. 멋진 로맨스다! 아직도 어딘가에 있을 “사랑하는 그님을 "기다리고 있다. “사랑하는 때가 결혼하는 때야! “라고 말하면서.
어째, 이야기가 좀 다른 곳으로 흘렀다.
중년이 되어서야 한다는 후배의 결혼, 이러쿵저러쿵했지만 축하해 주었다. 둘이 가는 세상은 좀 덜 외로울 수 있고, 덜 힘겨울 수 있을 테니. 하지만 "너무 잘했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남아있어도 "괜찮아!"라는 말을 더 해주고 싶었다. 결혼이라는 건 혼자라는 외로움을 겪는 것보다 힘겨운 일이고,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지 않나.
결혼을 한 사람은 "아, 힘들어~" 하며 살고,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은 그 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
결혼이란 참 아이러니하다. 아직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은 순수한 열정 주의자인 내 친구나 후배에게 결혼이란 여전히 미스터리처럼 신비한 그 무엇에 홀린 것 같은 것을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