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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ue Moon Mar 02. 2019

졸업 선물 대신 쪽지편지

 상자 속의 인생 팁들

노란 개나리꽃이 활짝 피고 벚꽃이 눈송이처럼 바람에 흩어져 내리던 작년 5월 초,

조카, 레베카 Rebecca는 드디어 대학 졸업을 했다.


국민학교 때 이모인 내가 있는 시카고에 와서 영어의 혼돈시대를 잠시 겪다가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서 이제  간호대학 졸업을 끝내고 성인으로 , 커리어 우먼으로 새로운 인생길의

출발이다.


그녀와 나의 인연에 대해 좀 언급하자면, 다소 길어질 것 같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그 스토리를 얘기하는 게 좋겠다.

내가 미국에 들어오기 직전 잠시 서울 언니(레베카 엄마) 집에 있을 때였다.

레베카는 그 해 어느 무더운 여름날에 태어났는데, 그 조카 아기는 정말 예뻤다. 

(음. 누구나 조카들은 다 예쁘다고 하지만)


그 당시 언니는 1년 터울 배기 말썽쟁이 레베카 오빠에게만 거의 매달려서 매일매일 

정신없이 지냈다.

그러다 보니 레베카는 내 차지가 되었고, 또 당연히 내가 엄마 인양 차지하고 업고, 재우고, 

기저귀를 갈아주며, 목욕을 시키는 등 거의 보모 노릇을 톡톡히 했다.

그녀가 태어났을 무렵에는 자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내내 그 옆에서 지켜보고

볼에 연신 뽀뽀를 해대는 바람에 언니에게 투정을 많이 듣기도 했다.


간혹, 주위 사람들이 "어째, 아이가 이모를 많이 닮았네요~" 하면, 그 소리가 그렇게

듣기 좋았다. (옆에 있는 언니는 내심 그런 말이 싫었겠지만.) 

그로부터 대략 1년쯤 되었을까, 아마 그녀가 아장아장 막 걷기 시작했을 때였다.

내가 미국으로 떠나는 날 아침이었다.

제 딴에는 무언지 심상찮은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문 앞에까지 겨우 걸어 나와

막 울음을 터뜨리면서 떠나는 나를 배웅하던 그 모습도 선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레베카와 나의 두 번째 인연은 미국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자녀가 없는 우리 가정에 초청된 것이다.

레베카는 한국에서 국민학교 6학년 여름방학 때 미국으로 들어왔는데 그 해 8월에 

국민학교 5학년으로 입학했다. (학업을 쫒아가기 위해서 1년 저학년으로 입학)

처음부터 소위 학군이 좋다는 곳에 몰려있는 한국 친구들이 많이 있는 학교를 

굳이 선택하지 않았다. 

영어를 빨리 익히기 위해서였다.

학군이 좋다는 곳에는 한국에서 들어오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소문으로는,

서로 한국말을 하다 보니 영어 익히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베카가 들어간 학교는 한국사람이라곤 영어만 할 줄 아는 여자 친구가 딱 한 명만 있는 학교였다. 

영어를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던 레베카는 죽을 노릇이었겠지만. 

이 친구는 학교의 배려로, 한국말을 못 했지만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레베카의 도움 이로 나섰다.

영어에 완전 초보자인 레베카에게 그야말로 완전 무법지대인 미국 학교생활(숙제 도움이 등) 

가이드 노릇을 톡톡히 해 주었다. 

그런 와중에 생긴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자면,

체육시간이 있었던 어느 날 선생님이 "Rebecca! where's your gym cloth?" 물었다.

그 말은 어떻게 알아듣고서 얼른 대답한 말이,

"Ummm~~~~ My 체육복 here!"이라고 영어와 한국말을 당당하게 섞어서 대답하였다 해서

우리를 웃게 만든 기억이 있다. 

레베카는 영어만 하는 그 친구 덕에 얼마 되지 않아 영어를 구사하기 시작했고 점점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국민학교를 지나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보내면서 사춘기를 맞이했고 그때

우리(나와 레베카)는 엄청 많이 싸웠다.

남편은 그녀에게 "이모부는 천사야"라고 부를 정도로 다정다감한 사람이었고 

항상 그녀의 편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잔소리와 온갖 싫은 소리만 하는 악당 이모였기 때문에.

항상 자기편에서는 아군과 적군이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 사이는 남편을 가운데 두고

뭐 서로 아군과 적군이 되는 것을 되풀이하면서 지낸 셈이다.


이제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

엄마라면 더 많이 참고 베풀 수 있었던 사랑도 흠뻑 주질 못했다.

이모라서 마음을 때리는 말도 쉽게 했고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점도 많았다.

부모. 가족이랑  떨어져 지내면서(물론 방학 때면 한국을 갔지만) 혼자 감내해야 했을 

"그리움과 외로움"에도 전적으로 함께 해 주질 못했다. 

그저 영어를 빨리 깨우쳐서 공부만 잘해 주길 바랬다.


이렇게 어린 레베카의 보모가 되기엔 별 자격도 없었고, 다소 엉터리인 나와 살면서 

레베카가 신앙으로 때 묻지 않는 선한 아이로 자란 것이 정말 대견스럽다.


 


대학교에 들어가서야 우리는 그간의 냉전시대?를 종식하고 서로 마음의 악수를 

조금씩 나누면서  친구가 되기 시작했다.

서로의 삶을 나누는 상담자이며 충고자가 되어 가고 있다.

산전수전 그야말로 공중전 다 겪어가면서 말이다.

어쩜 순전히 나 혼자 생각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난 그렇게 느끼고 또 믿고 싶다.

한국에 있는 레베카의 엄마 (나에게는 친언니)가 이 말에 조금 질투를 느낀대도

어쩔 수 없다.

난 이 말을 써야 되겠기에..


이제 레베카가 대학 졸업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그녀에게 어떤 졸업 선물을 할까 내내 고민을 했다.

먼저, 흔히 하듯 멋진 레스토랑에서의 훌륭한 저녁식사와  졸업을 축하한다는 

말이 담긴 예쁜 카드와 돈이 든 봉투를 준비하는 일들을 생각했다.


그러다,  왠지 모두가 하는 식의 졸업 축하는 그 아이에게 곧 잊힐 거고, 나에게도 지루한

행사라는  느낌이 들었다. 

음. 이런 것 말고 좀 더 특이한 것 없을까? 하고 내내 골똘히 생각했다

졸업 축하와 격려가 담긴 카드도 잠시 어느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가 

곧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이 분명했다.

이런 건 그녀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 거라는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이제 곧 첫 직장에서 세상살이의 출발을 하는 그녀에게 잊히지 않을 그 무엇을 선물로

준비하고 싶어 졌다.


그래서 난 결심했다!

예쁜 선물과 카드, 돈봉투는 모두 생략하기로. 

대신 난, 한 달간을 고민 끝에, 그녀에게 "쪽지편지"들을 쓰기 시작했다.

30대 , 40대 중년의 나이를  살아오면서 내가 느낀 "인생에 관한 팁들을 -여러 주제별로 

만든 쪽지편지들을" 써 갔다.

이 편지들로  만들어진 조그만 상자가 내가 그녀를 위해 준비한 졸업 선물이었다.


"레베카,  네가 살아가는 인생길에서 삶의 팁이 필요할 때마다 이 조그만 상자 속의

쪽지편지들을 보렴."


작은 상자 속의 "쪽지편지들"을 받은 레베카는

" 이모! 너무 감사해!! "라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해주었다. 


그녀의 첫 인생의 출발이 , 그 순간

"불꽃놀이"처럼 그녀의 머리 위에서 화려하게 빛나 보였다.

인생의 팁이 담긴 쪽지편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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