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4월부터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녀의 배려심 가득한 카톡은 물론이고, 다정하게 나를 부르던 목소리도 다시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녀와 나는 첫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날 같은 반이 되었고, 엄마와 아이가 함께 서있는 줄에서 앞뒤로 줄을 섰다. 둘 다 첫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는 거라 아이보다 더 긴장한 초보엄마들이었다.
미국사람 가득한 학교에서 너무 무서워 말 한마디 못하고 서있다가 '혹시 한국사람이세요?'라는 질문과 함께 서로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고 나와 그녀와의 인연은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그 세월 동안 우리는 거의 일주일에 두세 번은 만났으니 셀 수도 없는 날들이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방학이 되면 거의 붙어살았던 거 같다.
수영장에 가서 물속에 아이들을 집어넣어 놓고 우리는 물 언저리 의자에 앉아 끝도 없이 수다를 떨었고
그러다 저녁밥 할 시간이 되면 피자나 시켜 먹자며 수영장으로 피자를 시켜 물에 젖은 아이들과 맛나게 먹었었다. 과외를 해도 같이 시켰고 수영레슨을 받아도 같이 받았다.
아이들이 중고등학교에 올라가 바빠지게 되면서부터는 아이들이 학교에 있을 시간에 만나 쪽지시험 하나하나 까지 서로 고민하며 위로하며 그렇게 지냈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는 서로 손을 붙잡고 얼마나 부들부들 떨었던가..
시간이 지나 아이들은 대학에 갔고 기숙사에서 사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물건의 이야기며 아이들의 이상한 룸메이트 이야기까지 우리는 함께 아이들을 키웠다.
초등학교 때 만나 함께 키운 아이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이젠 엄마의 손길이 그렇게 까지는 필요치 않아 우리의 이야기는 멀리서 지켜보며 응원만 할 뿐이라는 이야기로, 또 아이들이 사귀는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랬다... 그렇게 늘 함께 지낸 그녀가 어느 날 바쁜 일이 생겨 당분간 연락을 할 수 없다는.. 혹 시간이 나면 연락을 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잘 지내시냐는 카톡을 보내면 한 일주일쯤 있다가 읽어보고는 묵묵부답이다.
그런 시간이 한 달 두 달 계속되더니 일 년이 지나버렸다.
처음엔 놀랐다. 너무 걱정이 되었다. 도대체 얼마나 안 좋은 일이 있길래 꼭꼭 숨어버린 걸까 하고..
그런데 아이들이 별일 없이 잘 지내는 걸로 보아서는 집에 일이 있는 것 같지는 앉았다. 그저 심경의 변화였던 것 같다.
그때부터는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니 알 수 없는 감정이 일었다. 도대체 이 감정의 이름은 무엇일까?
알 수 없는 나의 마음을 붙잡고 지내던 날 페터 비에리의 '삶의 격'이라는 책을 읽다가 나의 감정의 의문이 풀렸다.
'우정이 끝나거나 누가 절교를 선언할 때, 또는 상대방의 태도가 싸늘하게 돌변했을 때 왜 그런지 알고 싶다. 삶의 한 부분이었던 누군가가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지면 두 가지 면에서 가슴이 아프다. 하나는 그 사람의 부재요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의 해명정도는 들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음으로써 느끼는 서운함이다. 인간의 감정은 맹목적인 성질도, 자의적인 내면의 롤러코스터도 아니다. 감정은 스스로의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소망에 뿌리를 둔 것이다. 타인이 우리의 내면세계에 변화를 일으키는 어떤 행위를 가하면서 이 점을 간과한다면 우리의 존엄성은 상처를 입는다. 내면의 변화를 떠맡고도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굴욕이기도 하다.'
그랬다. 나의 의문의 감정은 '굴욕'이었다.
거의 20년을 함께 보낸 사이에 당연히 있어야 했던 해명이 없었다. 일방적인 통보만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어떠한 기회도 주지 않았다. 사과가 필요한 일이었다면 진심 어린 사과를 했을 것이다.
어렸을 적 아이들의 모든 시간에 그녀가 있었다. 그녀를 빼고 아이들과의 추억을 생각해 보는 건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놀랐고, 걱정이 되었고, 서운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굴욕적이었다.
이 모든 것이 지나고 나니 이제는 그리움 만이 남았다.
다 모르겠고 그냥 나는 그녀가 그립다.
길에서 우연히 그녀를 만난다면 그리움에 목구멍이 아플 것 같다.
혼자만의 시간을 택한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가끔은 내 생각을 할까? 하고 나는 또 바란다..
그만 좀 해라.. 쯧쯧.. 싫다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