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스블루 Apr 15. 2024

4. 무대는 한 번뿐이다

20년이 넘도록 미국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게 있다.

바로 영어다. 

휴... 영어 이야기를 하자니 벌써 한숨부터 나온다.

일상의 대화는 된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알아듣고 리액션도 하고 내 의견도 말하고.. 그런 것들이 되기는 한다. 

but 완벽하지 않다. 그리고 찬란하고 아름다운 언어의 향연을 펼칠 수는 없다. 

이런 식이다. 대화를 하면서 중간중간 속으로 '앗! 왜 그런 이상한 문법으로 말을 한 것이야! 

그러나 이미 늦었다. 고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는 벌써 지나가 버렸는데 굳이 '아까 말이야 내가 이렇게 말했는데,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거야'라고 할 수는 없다. 무대는 한 번뿐이다.

사실 지독히 억울 나는 한국말을 이토록 아름답고 고상하게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데, 영어로 이야기를 하자고 들면 유치원생이나 쓸법한 단순한 문장구조의 말을 써야 하니 말이다.

사정이 이러니 혼자서 나를 위로한다.

'그래 나에게 영어는 제2 외국어일 뿐이야.. 자기들은 뭐 제2외국어 나만큼이나 할 수 있나? 쳇!!

동네 지인들을 만나서 술 한잔을 기울이며 사는 이야기를 할 때면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스토리가 있다. 

다들 자신들의 굴욕적인 영어대화 스토리들을 몇 개씩 가지고 있는 탓에 주제가 영어로 넘어가면 웃느라 마룻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얼마만큼의 눈물을 흘려야 이야기의 끝을 볼 수 있다.


몇 달 전 안과검진을 해야겠다 싶어 병원을 찾았다.

의사이름이 죽 나열되어 있는 곳에 라스트네임 kim이 있었다.  '한국의사가 있네'라는 반가운 마음에 예약을 하고 진료날이 되어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한국사람이었지만 영어가 더 편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내가 '안녕하세요'라고 하자 나를 배려하고 싶은 마음에선지 잘 안 되는 한국말로 진료를 보기 시작했다.

의사는 내 눈에 기계를 갖다 댔다. 그러고 나서는 내 눈동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눈뜨세요 눈 감으세요'라는 말을 하고 싶었나 보다.

냉철하고 세상 똑똑하게 생긴 그의 입에서 나오는 어눌한 한국말은  '눈 여세요! 눈 닫아요! 였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눈을 열고 닫으라는 의사에 말에 상당히 고통스러운 순간을 보냈다.

기계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아서 누구보다 열심히 내 눈동자를 관찰하고 있는 그의 앞에서 웃음을 터트릴 수는 없었다. 가까스로 허벅지를 꼬집으며 이를 악 물어야 했다.


영어는 나에게 아직도 타협이 되지 않은, 화해가 되지 않은 웬수같은 베스트프렌이다.

내 생애 끝이 나는 날까지도 나는 그들의 버터 바른 발음과 정확한 문법으로 영어를 구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나에게는 세상 아름답게 말할 수 있는 나의 언어, 한국말이 있지 않은가~~~



이전 03화 3. 타인과 나누는 일초의 웃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