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일 월요일-걷기
운동을 통 못했다.
미국은 일 년을 통틀어 11월과 12월이 제일 바쁜 달인 것 같다.
지난주엔 느른하게 걸으며 초겨울을 만끽하려고 했건만 걷기는커녕 뛰어다녔다.
연휴가 끝난 첫 월요일은 몸이 축축 쳐진다.
한국의 긴 연휴가 끝난 날, '출근.. 실화냐?'라는 지인이 남긴 카톡을 보고 빵 터진 적이 있다.
굉장히 길고 시간도 많고, 24시간이 아니라 하루가 36시간 정도는 되는 달콤한 일주일을 보낼 줄 알았는데, 어떻게 보면 더 짧게 훅 지나가 버렸다. 너무해.....
정신을 차리자.
몸의 적응을 위해 천천히 걸어보자.
걸으며 다시 마음을 다잡자.
사람들은 올해가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고 아쉬워하기도 하고 시간이 이렇게 빠르냐며 어리둥절해 하지만, 사실 시간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싶다.
각각의 달에 이름이 없고 요일도 없고 연도도 없다면,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애 닮아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저 매일매일만 잘 살아내려고 하지 않을까? 미래에 대한 걱정도 과거에 대한 아쉬움도 없이 오늘만 사는 것 말이다. 그렇다면 1월 1일이 무엇이고 12월 31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괜히 일상으로 복귀하기 싫으니까 헛소리 하고 있다.
휴가 갔다가 부대로 복귀하는 훈련병들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 날이다.
다른 거 다 집어치우고 나가서 걸으며 너의 몸을 잘 달래서 이어지는 삶을 살게 하거라.
12월 3일 화요일-고지서 정리
월초가 되었다.
이것저것 여기저기 내야 할 돈 내야 하는 시간이다.
제일 귀찮고, 내가 쓴 카드값을 보며 스스로 혼내는 날이다.
하루의 끝으로 미뤄놓을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시작한다.
'개구리 먹기'로 하루를 시작하기로 했느니 도망가는 마음을 잡으러 간다.
풍성하게 쌓여있는 고지서가 정말 부담스럽다.
자동이체를 할 수도 있고, 이메일로 고지서를 받아 볼 수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페이퍼를 직접 받아보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이제는 나도 나의 기억력을 믿지 못하니 이메일을 일일이 찾아보다고 빠뜨리는 페이먼트가 생길 것 같아서 그렇다.
엘에이에 홈리스가 점점 늘어난다.
모두들 저마다의 사연이 있지만 매달 내야 하는 돈을 더 이상 낼 수 없어서 홈리스가 된 경우가 꽤 있다.
차를 타고 가며 거리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본다.
지쳐서 표정이 멍하거나 길 위에서의 생활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험상궂은 표정이 되어 버린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며 저들도 한떄는 부모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아기였겠지.. 식구들에게 월급을 가져다주는 아버지였고 남편이었겠지.. 꿈이 많은 청년이었겠지 하며 상상의 날개를 펴다가 이내 슬퍼져 마음이 우울해진다.
그들은 홈리스가 되고 나서 페이먼트에서 벗어나서 가장 좋다고 한다.
무엇이 정답인지.. 모르겠다.
12월 4일 수요일- 숙제검사
책상에 쌓여 있는 한국학교 아이들의 숙제.
우리 아이들은 이중언어를 하느라 고생이 많다.
특히 엄마와 아빠의 나라가 다른 아이들은 3중 언어다.
낯선 언어를 익히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는 아이들.
아빠가 일본 사람인 한 아이는 아빠도 모르고 나도 몰라서 숙제를 못해 왔다며 고개를 숙인다.
'괜찮아 선생님이 가르쳐줄게' 하며 유쾌한 웃음으로 아이의 민망함을 무마시킨다.
꼬불꼬불한 영어를 쓰다가 각이 딱딱 져 있는 우리글을 써온 아이들의 노트를 보며 내 손가락이 다 아픈 느낌이다.
아이들의 노트를 보니 아이들이 보고 싶다.
12월 5일 목요일-답글달기
오우.. 이런 일이..
아직 완성을 마치지 못하고 띄엄띄엄 쓰고 있는 나의 브런치 매건진 '일기 쓰기 싫어 시 쓰던 아이'에 답글이 달렸다.
어느 한 작가님께서 7편의 시중 6개의 시에 꽤 긴 답글을 주셨다.
연달아 울리는 답글이 달렸다는 브런치 스토리 알람을 보고 가슴이 떨려 천천히 열어보았더니.. 수줍은 나의 시에 최고의 찬사들이 있었다.
나와 마음이 같아 시가 크게 마음에 닿았다는 다정한 답글에 나도 긴 호흡으로 답글을 단다.
너무 고맙고 벅차서 나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것이 느껴진다.
글쓰기가 어려울 때.. 글쓰기가 부담이 될 때... 글쓰기가 얄미울 때.. 내게 보내준 작가님들의 답글들을 보며 노트북을 열 것이다.
'향유와 향이 마음을 기쁘게 하듯
친구의 다정함은 기운을 돋우어 준다. (잠언 27,9)
12월 6일 금요일-코스코 장보기
크리넥스도 떨어지고 야채도 없고 하다못해 손비누도 떨어져서 이 화장실 저 화장실로 구걸하러 다닌다.
코스코에 들려야 할 시간이다.
오후에 사람이 많아지기 전에 다녀오자! 오늘치 개구리 먼저 먹자!
어떤 사람들은 창고형 대형 마트에 가면 오히려 과소비를 하게 되어 좋지 않다고 하기도 하지만 많은 용품이 대형 창고형 마트의 가격을 따라가지 못하다.
언젠가 읽은 기사에 보니 이런 대형마트들은 회원비로 운영이 된다고 한다.
그러니 세일이라도 해서 사는 물건의 가격은 원가에 받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그러나 산더미같이 쌓아놓은 물건을 보면 괜히 신나는 기분이 느껴지며 계획에 없던 물건을 카트에 슬며시 넣게 되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특히 지금과 같은 트리스마스 시즌엔 말해서 뭐 할까..
간절히 집으로 가져가고 싶은 물건을 눈으로만 만끽하고 절대 만지지 않는다.
간신히 깨끗해진 차고를 다시 망칠 수는 없다.
무사히 계획된 쇼핑을 마쳤다.
12월 7일 토요일- 엄마한테 전화하기
엄마한테 전화하는 일이 '개구리 먹기'에 들어갈 일이냐? 하실 수도 있지만
시간을 들여해야 하는 일이고 엄마가 기다리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오늘의 '개구리 먹기'로 지정하게 됐다.
아빠가 떠나시고 혼자의 삶을 살고 계신 엄마는 전화를 받자마자 며칠간의 일들을 '랩'을 하듯 속사포로 쏟아내신다.
새로운 이야기와 며칠 전 들었던 똑같은 내용의 이야기가 반씩 섞여있다. ^^
똑같은 이야기를 몇 차례 들었을 때 나의 인내심이 바닥이 나서 '엄마 그 얘기했는데?" 했더니 엄마의 대답은 '그래도 또 하고 싶어'였다.
아하하 그게 정말 솔직한 심정인 것 같다.
해도 또 하고 싶은 이야기.. 남한테는 중요하지 않지만 나한테는 무지하게 중요한 이야기..
엄마의 그 대답을 듣고 나서는 100번을 해도 또 들으리라 마음을 먹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효도라 생각하며...
12월 8일 일요일- M 할머니 크리스마스 선물 준비
M할머니와 자원봉사를 시작한 지 1년이 거의 다 되어 간다.
지난주에 할머니에게서 이른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다.
귀여운 종이 상자에 작은 향초와 맛난 쿠키와 스웨터에 하면 알맞을 내가 좋아하는 실 줄의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나를 힘껏 안아주며 '정말 작은 거야'라고 말한다.
카드엔 멋들어진 필기체로 너의 성실함이 좋다고 쓰여있다.
나도 이번주에 답 선물을 드려야 한다.
'선물포장' 개구리부터 먹고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은 바쁜 날이니 이따가는 개구리 못 먹는다.
한국 화장품을 준비했다. K 뷰티가 미국에서도 인정을 받는다.
그냥 살았다.
내 생활도 지고 가기 힘든데... 무슨 지역사회에 나가 봉사를 한단 말인가..
그러다가 이상한 힘에 이끌려 무보수인 봉사를 시작하게 됐다.
성당에 있는 기프트 샵인데, 일요일에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일요일에 쉬고 싶은 마음은 모두 똑같은 것 같다.
자원봉사에 나가보니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노인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참으로 젊은 사람에 속했다.
이해한다.
젋었을때는 일해서 생활비 벌어야지.. 아이들도 키워야지.. 주말엔 모임도 많고 놀러 갈 데도 많고..
노인이 되어 아이들은 모두 각자의 삶의 위해 떠나고 은퇴를 하여 연금이 나오니 더 이상 생활비를 벌지 않아도 되고.. 그제야 지역사회에서 필요한 일손이 보이는데.. 내 몸은 이미 노인의 카테고리에 들어가 버렸다.
이제라도 남들을 위해 무보수로 일해주자. 하고 자원봉사 현장에 나온 것이다.
그러나 몸이 잘 따라주지 않는다. 손도 느리고 잘 안 들리고 내 말이 전달도 되지 않는다.
슈퍼바이저는 일이 진행이 안되니 답답해서 속상해한다.
일의 진행이 안 돼 답답한 그의 마음도 이해가 가지만 보탬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의 마음을 일의 효율성이 없다고 비난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천천히 하면 된다.
다행이다.
내 몸이 내 말을 안 들을 때 봉사를 나오지 않아서... 힘 좋고 정신이 좋을 때 자원봉사를 하니 남들에게 큰 힘이 되어서.. 느려서 미안해하는 연세 많으신 봉사자분들에게 괜찮아 괜찮아를 연발하며 싱글싱글 웃어줄 수 있어서..
무보수의 매력은 반드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