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의 변명
음주 운전은 살인과 같다. 물론 살인과 살인미수는 다르게 처벌하기 때문에 동등한 형량을 받아야 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다만, 살인과 살인미수의 끝은 한 가지다. 다른 사람을 해하겠다는 목적이 분명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음주 운전이라고 다를까? 전혀 다르지 않다. 음주 상태의 위험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고, 더해서 운전까지 한다면 어떻게 될지는 초등학생도 인지하고 있다. 다 큰 성인이 음주 운전의 심각성을 모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면허 정지가 아닌 취소당한 사람 또한 크게 반성하지 않는다. 벌금도 냈고, 법적 처벌을 다 받았으니 자기 잘못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감옥을 몇 년을 다녀와도, 심지어 죽음으로 사죄해도 다르지 않다. 한 번 저지른 죄는 두 번 반복하지 않아도 절대로 없어질 수 없다. 살인자가 죽인 무고한 피해자가 다시 살아서 돌아올 수 없듯이 말이다. 음주 운전으로 사람을 치어 죽이는 사고는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 피해자는 대체 어떤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돈 몇 푼에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범죄자는 과실치사로 낮은 형량을 받고 남은 인생을 유유자적 살아간다. 심지어 다시금 똑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버러지도 적지 않다.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이 음주 운전을 해온 전력이 있기에 입법 과정이 소극적이었다. 법 적용을 제대로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음주 운전은 어떤 형량을 받아야 하냐고 묻는다면 그것을 필자도 알 수 없다. 다만, 정상적인 조치는 적확하게 말할 수 있다. 면허 취소, 정지가 아닌 평생 운전할 수 없게 면허 금지를 주어야 한다. 혈중알코올농도가 대체 왜 중요한가. 술만 먹으면 운전대를 잡는 사람이 본인의 혈중알코올농도를 측정하고 운전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저 술만 들어가면 운전하는 버러지에게 어째서 기회를 주어야 하나? 단 한 번이라도 음주 운전을 했다면 다시는 운전대를 잡을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그런 버러지가, 살인 미수범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정상인처럼 사회에 돌아다니는 꼴이 개탄스럽다. 그런 개 버러지가 요즘 사람들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타인에 대해서 부정적인 소리를 내뱉는 것이 통탄스럽다.
우리나라는 범죄자들에게 가해지는 철퇴가 유독 약하다. 필자는 비질란테를 옹호하지 않는다. 마치 함무라비 법전처럼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논리를 접목한다면 세계는 혼돈에 빠질 테니까. 그러나 내 가족에게 그런 일이 생겼을 때, 스스로가 비질란테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은 할 수 없다. 나라가, 법이,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해 주지 않는다. 그 상처는 곪고 썩어 피해자의 정신을 갉아먹는다. 그런 상황에서 나타나는 비질란테는 막을 방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