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을 알라
모른다고 말하는 게 굉장히 부끄러웠다. 누군가 ‘당연히 알겠지만’으로 시작하는 말을 하는 순간 어쩐지 긴장됐다. ‘잘 모르겠습니다.’라는 말을 하기 싫어 불편한 동작과 어색한 시선 처리를 하며 아는 척을 시작했다. 그렇게 하면 상대방이 알아채지 못할 줄 알았다. 대충 어디서 들은 내용을 마구잡이로 내뱉었다. 그렇게 발전 없이 지적 허영심에 잡아먹혔다.
글 박진권
모른다는 것은 지적 욕구를 자극한다. 전혀 관심 없고, 모르던 분야의 책을 마지막 장까지 읽으면 짜릿한 쾌감이 온몸을 감싼다. 절반은커녕 1할 정도밖에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대단히 만족스럽다. 물론, 타인에게 설명하거나, 아는 척은 하지 않는다. 그저 나만 알고 있는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킬 뿐이다.
아는 척의 강박을 놓았을 때 비로소 지식의 새로운 길이 보였다. 여전히 모른다는 것을 인정했다. 알고 있다고 자부한 학문을 반복해서 공부했다. 관심 없는 분야의 책만 읽던 시기도 있다. 그렇게 어제의 나보다 깊어지고 넓어졌다. 물론, 모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명확하게 알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공부하면 할수록 모호해지고, 말하면 할수록 횡설수설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읽고,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안개 낀 뿌연 시야도 결국 걷어지듯, 언젠가는 내 생각을 막힘없이 내뱉는 날이 온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안다고 자랑하기 이전에 인지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내가 무엇이 부족한지, 어떤 분야에 재능이 있는지 앎으로써 인간은 어제보다 더 나은 나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내가 무엇인지, 누구인지 알아가는 것은 어떤 교과 과정보다 훨씬 수준 높은 공부다.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내면의 나와 마주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타인을 보는 능력이 개화된다. 아는 척 자만하고, 모르는 사람을 멸시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얻을 수 없는 능력이다. 그들은 평생 타자의 겉만 핥을 뿐이다. 내가 누구인지 고민한 만큼만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도 인간은 평생 스스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의미 없는 시간은 아니다. 결승선을 통과해야 순위가 매겨지듯, 끊임없이 나를 공부하는 행위는 인간이 가고자 하는 길을 포기하지 않게 한다. 평생 모른다 해도, 끝까지 가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한 번 사는 인생, 무엇이든 끝까지는 가 봐야 하지 않겠나. 마지막까지도 여전히 알지 못해도 말이다.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몸속의 가시를 빼내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이 공통으로 지닌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어리석음을 어리석음이라고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