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스럽게, 중용
회색분자는 비겁한 박쥐라는 글을 읽었다. 우 또는 좌 편향보다 더 나쁜 사람은 회색분자라는 논지다. 그들 생각에 회색분자는 사리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 입맛에 따라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배신자다. 나는 평화시위를 응원하면서, 이준석을 좋아한다. 벤 샤피로와, 조던 피터슨의 논리에 감동하면서 동시에 유시민 작가님의 지식에 감탄한다. 이들의 고차원적인 시선을 선망하며 닮으려 노력한다. 나는 중용의 덕을 따르는 중립인으로 향하길 희망한다.
글 박진권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차라리 치우치는 게 훨씬 쉽다. 내가 지지하는 것의 악덕은 보지 못한 척 눈을 감으면 그만이고, 반대 세력의 부정만을 아르고스처럼 감시하면 될 일이다. 이것보다 쉬운 선택은 없다. 하지만, 나는 험준한 산을 선호한다. 아무리 어려운 길이라 해도 중용의 덕을 따르면서 중도를 지향한다. 지나친 것은 언제나 문제를 생성하기 때문이다. 넘치는 것은 언제나 모자란 것 만 못하다.
한편으로는 치우치는 것 또한 필수 불가결이라고 생각한다. 이데올로기적 관점으로 봤을 때 치우치지 않고, 중용을 유지하면 어떤 것도 바뀌지 않는다. 개인의 사상이 명확하지 않기에 단체에 속하지 않을 것이고, 나라를 움직이는 대중이 되지 않는다면 원하는 세상을 만들 수 없다. 결국 원하는 나라로 나아가기 위해선 한쪽으로 치우쳐야 한다. 그렇기에 뚜렷한 색이 있는 것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다만, 검은색과 흰색만을 고집하고, 회색은 인정하지 않는 인간을 멀리하는 것 뿐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나는 중용이라고 보기 어렵다. 양쪽의 악덕을 매섭게 비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사상은 ‘그럴 수 있지’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라고 볼 수 있다. ‘그럴 수 없고, 그래선 안 된다’이다. 위에서도 밝혔듯, 자기가 지지하는 곳의 악덕은 이 악물고 외면하는 인간 군상을 가장 혐오한다. 그들의 입에서 회색분자라는 소리가 나올 땐 대화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설명이 통하지 않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선택을 무시하고, 감성적인 생각으로만 가득 찬 세상에는 자유가 사라지기 마련이다. 자유를 선망했던 선대들의 유지를 받은 후손들이 오히려 자유를 망가뜨리고 있다. 강요와 자유는 공존할 수 없다. 감시와 자유는 병립될 수 없다. 탄압과 멸시는 절대로 자유와 동존할 수 없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공생을 목적으로 강요와 감시를 활용한다면 되려 안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단적인 예로 법과 폐쇄 회로가 있다.
계속해서 중용의 덕을 따르려 노력한다. 이성을 유지하고, 비이성적인 행위도 부분 이해한다. 사실 나와 비슷한 사람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회색분자라 명한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고, 우파 혹은 좌파라고 명명한다면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끄덕이겠다.
의미 있는 개인적 장점을 지닌 사람은 언제나 자국민의 결점을 보고 있으므로 오히려 자신의 민족이 지닌 결점을 가장 또렷하게 인식할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것, 즉 타인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앞서 말했듯이 명예, 지위, 명성으로 나눌 수 있다. 지위란 인습적인 가치, 즉 엄밀히 말하면 허구적인 가치다. 지위의 작용은 허구적인 존경으로, 모든 것이 대중에게 보이기 위한 희극이다. 대중은 눈과 귀를 갖고 있지만, 그 이상은 갖고 있지 못하다. 특히 판단력은 형편없으며 기억력도 그다지 좋지 않다.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