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진권 Dec 19. 2024

확신 없이 글을 쓴다

하루에도 수십 번


확신 없이

글은 쓴다


퇴근 후 할 일을 신속하게 해치우고 22시에는 취침하려고 노력한다. 다음 날 6시에 일어나 글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휴일에도 마찬가지다. 아직 책 한 권 나오지 않았고, 뚜렷한 성과 또한 없음에도 계속해서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 확신과 작문의 즐거움 그리고 어떤 안도감과 불안감의 공존 등 알 수 없다. 분명 예전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아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습관에 가까워졌다.


박진권




하루에도 수십 번

매일 글을 쓰다 보면, 가끔 멍해질 때가 있다. 내가 왜 글을 쓰고 있는지,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라는 내면의 속삭임이 눈의 초점을 흐리게 만든다. 과거의 글을 살펴보면, 작문의 필요성을 줄줄 적어놨다. 그중 아무리 흔들려도, 책 한 권 나오지 못해도, 글 쓰는 일은 평생 지속할 거라는 글도 있었다. 또, 내 육신은 사라져도 내 사상이 담긴 책은 남아있길 희망하는 글도 있었다. 반 고흐처럼 죽은 후에 사람들이 진가를 알아줘도 괜찮다는 생각도 했다.


거창한 이유를 만들고, 그것에 심취할 때도 있었다. 어쩌면 예술 병에 걸려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작문의 필요성은 몇 년 전부터 서술했다. 더 이상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음에도, 계속해서 더 큰 이유를 만든다. 이유가 명확해질수록 의심도 증폭된다. ‘왜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다시금 머릿속에서 울린다.


뭐가 됐든 이제는 그냥 쓴다. 틈이 날 때마다 키보드를 두드린다. 이동 중에 어떤 생각이 번득이면 휴대 전화를 들어 올린다. 급할 땐 휴지에 적기도 한다. 더 이상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이제는 쓰는 행위만 남아있을 뿐이다. 깊은 사색도, 폭넓은 사유도 좋지만 일단 내가 해야 할 일은 작문이다. 작가를 꿈꾸는 사람이 읽기만 하고 쓰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인가. 남의 생각만 계속 받으며 내 자아를 그려나가지 못한다면 작가라고 할 수 없다. 쓸데없는 생각은 줄여야 하기에 그냥 쓰기로 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의심되지만, 마음속 깊이 밀어둔다. 서른이 넘은 지금, 이제는 쓸 시간이다.


작품의 명성은 점차 서서히 나타난다. 처음에는 조용하다가 점점 명성이 높아져 때로는 10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진면목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작품이 영속적이기 때문에 명성도 오래 지속되어 때로는 수천 년간 지속되기도 한다. (중략) 작품은 판단에 어려운 점이 있다. 작품의 수준이 높을수록 판단이 더욱 어려워진다. 판단 능력이 있는 심판자가 많지 않으며, 때로는 공정하고 솔직한 심판자가 부족한 경우도 있다. -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