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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권 Dec 18. 2024

평화 시위를 응원한다

책임질 수 없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다


평화 시위를

응원한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인 사람이 있다. 애초에 대화 자체를 할 줄 모르는 인간들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 채 그저 팔을 휘두른다. 상대를 가격하고 때려눕혔을 때 이상한 쾌감을 느낀다. 이런 부류는 대체로 강자에게는 비굴하고, 약자에게는 포악한 성질을 보인다. 강자가 나무랄 땐 이해를 하지 못해도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약자의 지적은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반기를 들고, 자기의 뜻이 관철되지 않았을 땐 폭력을 사용한다. 이들에겐 이성이 없다.


박진권




책임질 수 없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다

이들에겐 갈고닦지 않은 본성만 남아있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 심지어, 정당성만 있다면 그것을 무분별하게 휘둘러도 된다고 믿는 족속이다. 물론, 책임도 지지 않는다. 상대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든, 괘념치 않는다. 그저 자기 연민에 빠져 본인이 가해자라는 것을 인지하지 않는 것이다. 행위에 대한 경중을 전혀 알지 못하고, 이해할 생각도 없다. 윤리적으로 잘못된 것은 범죄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폭력 그리고 재물손괴와 기물 파손은 논의할 필요 없는 완연한 범죄다.


평화 시위를 적극 응원하는 것엔 다 이유가 있다. 윤리적인 문제를 바로 잡을 때 사용하는 게 폭력이라면, 다수의 사람이 동조하긴 어렵다. 심지어 동조했던 사람의 이탈로 이어지기도 한다. 같은 뜻을 품었던 사람이 돌아서는 것을 단순하게 벗어난 것으로만 해석해선 안 된다. 그들은 단체의 치부를 명확하게 알고 있기에, 최악의 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난폭한 행동은 결국 혼돈을 불러온다. 질서 없는 단체는 목적의식이 옅어진다. 거기에 개인의 책임까지 부여되면, 그 단체는 산산조각이 날 뿐이다. 여론도 그들의 뜻에 동조하지 않는다. 대중에게 폭력의 정당성을 인지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반면 자경단은 폭력을 사용했음에도 대중의 지지를 받기 쉽다. 범죄자를 폭력으로 단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또한 지양해야 옳은 사회다.


토론과 시위는 무조건 평화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폭력을 쉽게 사용하는 깡패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분노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 표출해야 한다. 폭력주의로 시위하는 건 테러와 다름없다. 소수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자행하는 테러일 뿐이다.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지식인이라면 대중을 선동하는 히틀러의 간악한 혓바닥에 휘둘리면 안 된다. 계속해서 정당성을 유지하고 싶다면 폭력은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현명하다. 쿠데타를 할 게 아니라면 말이다. 2024년에는 유독 멍청한 시위가 판을 쳤다. 심지어 그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모습에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12월의 시위는 평화 시위의 표본이었다. 언젠가 교과서에 실려도 손색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훌륭한 국민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평화 시위라면 적극 찬성한다.


논쟁 중에 반대 논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난폭한 수단을 쓰려고 한다. 그것은 반대 논거와 같은 효과를 내고 좀 더 손쉽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그곳에서 의기양양하게 떠나간다. 이것으로 볼 때 사회에서 명예의 원칙을 고상하고 기품 있다며 극구 칭찬하는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다. -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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