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인간을 젊게 만든다
20대 후반이 되니, 어쩐지 조급해졌다. 언제까지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러다 40대가 되어서도 같은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부정적인 생각을 거듭했다. 사실 계속 그렇게 살았으면 50대, 60대가 되었어도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60대 중반인 어머니도 삶의 다채로움을 느끼는데, 나는 벌써 타성에 젖었다.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아직 포기할 때가 아니었다.
글 박진권
20대 후반에 잘 다니던 회사에서 퇴사했다. 미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목공과 출판,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인쇄 업종의 디자인 회사까지 왔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종착지였다. 나에게 직업이란, 글 쓰는 일을 도와주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업종을 바꾸려는 이유는 하나다. 조금 더 편하게 작문하는 환경 때문이다. 야근이 잦아 자기 바쁘거나, 전철에서 4시간을 보낸다거나, 굉음을 내는 기계 속에 갇혀 신체적, 정신적 긴장 상태가 이완되지 않는 경우는 작문에 이로운 직업이 아니다. 적당한 정신적 긴장 상태와 과하지 않은 신체적 긴장 상태는 오히려 작문에 큰 도움이 된다. 너무 팽팽하지도, 느슨하지도 않은 상태 말이다. 그러한 삶의 중용을 누릴 수 있는 것이 나에게 적합한 직업이었다. 말로만 하면 그런 직업이 어디 있냐고 물어볼 수도 있지만, 한 직장에서 6년을 보내고 난 후 겨우 1년 6개월 만에 찾았다. 진작 나오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용기를 내야 한다. 익숙한 장소에서 벗어나야 타성에 젖은 인생을 다시금 활기차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6개월 동안의 교육 1년 동안 두 번의 이직과 세 번의 신입 생활 그리고 30대. 절대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인생의 경로다. 그럼에도 하고자 하는 게 있다면, 당장 이직하는 게 옳다고 말하고 싶다. 꿈과 직업을 동일 선상에 둘 수는 없다. 타인이 만들어 둔 울타리 안에서 나만의 꿈을 펼치기는 어렵다. 적당히 타협해야 하고, 어쩌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완전히 숨겨야 할 수도 있다. 꿈의 직장은 없다. 그러나 나의 이상향으로 향하는 데 지렛대 역할을 해주는 직업은 분명히 있다.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다.
한국에서 30대는 완벽의 전초로 진입해야 한다. 안정적인 직장이 있어야 하고, 적당한 주거 공간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 시기의 사람들은 꿈을 향해 걷는 것을 포기한다. 늦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사실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늦은 게 맞고, 시작은 반이 아닌, 시작일 뿐이다. 하지만, 늦었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늦은 상태를 인지한 불행이고, 꿈으로 한 걸음도 떼지 못한 패배자일 뿐이다. 꿈이 없이 열심히 사는 게 목적인 사람은 그것 또한 꿈으로 향하는 길이 될 수 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인간에게 꿈은 필수다. 텅 빈 상태로 남들이 걷는 길을 의미 없이 따라 걷는 사람은 불만만 쌓인다. 해소되지 않는 불만은 인간을 미치게 한다. 이것이 나이가 들어서도 꿈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다. 세상을 향해 불만을 표출하는 미친 인간의 말로는 고독사 말고는 없다.
꿈으로 향하는 길은 무수히 많다. 꿈을 갖는 시기는 정해지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젊다.
우리의 삶은 너무 빈곤하므로 그것의 재화를 보다 알뜰하게 배분해야 한다. 젊음은 젊음이라는 부가 충분하니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 하지만 겨울나무처럼 온갖 기쁨과 향락이 소멸해 버리는 노년에는 명성의 나무가 진짜 상록수처럼 잎사귀를 낼 절호의 시기가 오는 것이다. 또한 명성은 여름에 자라지만 겨울에 먹을 수 있는 늦배에 비유할 수 있다. 노년이 되면 함께 늙어 가지 않는 작품에 청춘의 힘을 온통 쏟아부었다는 사실보다 더 멋진 위안이 되는 것은 없다. -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