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새해는 늘 조급하게 다가온다

뜬금없는

by 박진권

새해는 늘

조급하게 다가온다


맛있는 전을 부치고, 가족끼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곧 있으면 벚꽃이 만개할 테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형형색색 꽃들이 자기의 아름다움을 뽐내기 위해 고개를 들 것이다. 또 조금의 시간이 흐르면 하늘에 구멍이 난 듯 끊이지 않는 비가 내린다. 산이나 바다 등 여타 휴양지에선 행복의 소리가 흘러넘친다. 불볕더위가 사람을 구워내고, 그들의 인내심이 바닥날 때쯤 녹색의 푸르른 잎끝이 갈색으로 물든다. 왠지 모르게 깊어진 사색을 인식하면 오색찬란한 단풍이 갑작스레 마음속으로 훅 들어온다. 대지가 얼어붙고, 바람이 예민해지면 하늘에선 새하얀 천사들이 무리 지어 내려온다. 온 세상에 새하얀 이불을 덮고 눈을 한 번 더 깜빡이면, 떡국이 식탁으로 올라온다. 조급하게 다가온 녀석이 이제야 익숙해졌는데….


박진권




뜬금없는

계획했던 일정은 항상 실패하기 마련이고, 변수는 곳곳 산재해 있다. 무엇을 해보려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못 하게 하는 게 삶이다. 세상은 인간의 계획에 자비가 없다. 어린아이가 개미굴을 무참히 짓밟듯, 인간이 자연을 죄책감 없이 도려내듯, 그 죄책감으로도 인간들의 학살은 멈출 수 없듯, 내 편이 아니면 범죄자 취급하듯, 신념이라면 법을 어겨도 된다고 생각하듯, 나라를 지켰던 이념의 후예가 나라를 좀먹듯, 그 신념으로 죄 없는 인간을 심판하듯, 역설적으로 죄 없는 사람은 없다고 믿는 듯.


글은 수준이 아니라 취향이라 말하지만, 개인의 기준은 명확하게 있다. 뜬구름만 잡는 자기계발서에는 명징함이 없다. 위로되지 않은 치유 산문만큼 종이를 낭비하는 것도 없다. 감수성을 일으켜 세우지 못하는 문학 작품은 문학이라는, 작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아깝다. 기괴함만 남은 이념 관련 글에는 무조건적인 찬양만 보내는 이들은 대체 뭣을 보고, 무엇을 읽고, 어떤 것을 느끼는 것일까. 현재는 취향이라고 말하는 세상이다.


나는 자가 출판을 선호하지 않는다. 자가 출판 자체에 의의가 없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저 편집자들의 시선이 결핍된 책은 수준이 낮다고 믿을 뿐이다. 물론, 현재의 출판인들은 너무도 보수적이고, 부분적으로 썩었다. 대다수 편집자는 눈먼 봉사고, 그들에게 내 글을 맡겨야 한다는 사실이 한탄스럽긴 하다. ‘그래서 네 글의 수준은 우리들의 눈보다 고귀하고?’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다’라고 말할 것이다. 자기 자식이 남보다 못하다고 볼 수는 있어도, 그렇게 말하는 부모는 없다. 물론 오냐오냐할 생각은 아니다. 지우고, 다시 쓰고, 전부 지우고, 쓰지 않고, 폐기한 후 처음부터 다시 쓰는 퇴고인지 화장인지 알 수 없는 행동을 무한정 반복할 테니까.


모으고, 또 모으고. 쓰고, 또 쓰고. 건강하다가, 아프고, 있다가도 사그라지는 쓸모없다고, 부질없다고, 다 필요 없을 때 새해가 다가온다. 방전되어 쓰러지기 직전일 때, 다시 시작하라는 듯이, 아주 조급하게 나타난다.


어떤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전에 충분히 검토해 보는 것이 좋다. 모든 것을 철저히 심사숙고한 뒤에도 인간의 인식이 불충분함을 감안해, 조사와 예견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온갖 계산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상황이 여전히 생길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점을 유의해 항상 저울의 적게 나가는 쪽에 비중을 두고, 중요한 부분은 까닭 없이 건드리지 않도록 한다. 다시 말해 “굳이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마라”[살루스티우스 Gaius Sallustius Crispus (기원전 86~34), 『카틸리나』]와 같다. 하지만 일단 결단을 내리고 일에 착수한 이상, 모든 일이 되어 가는 대로 맡기고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 그런 다음에는 기왕에 실행한 일을 끊임없이 곱씹거나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위험을 자꾸 우려하며 불안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이제 그 문제를 깨끗이 잊고, 모든 것을 제때 충분히 생각했다는 확신을 품은 채 편안한 마음으로 그 문제에 관한 생각의 서랍을 자물쇠로 꽁꽁 채워 두는 것이 좋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