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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머금은 아이

산과 들 그리고 바다

by 박진권

자연을

머금은 아이


제대로 된 도로가 없는 길을 따라 아버지의 차는 계속해서 올라갔다. 주변엔 건물 하나 없었고, 우거진 수풀만 보였다. 짙은 녹색 잎이 그늘을 만들었고, 빛에 반사된 연한 초록 잎이 별처럼 반짝이던 곳이었다. 정오에 뜬 별에 넋을 놓고 있을 때 우리는 에메랄드빛 반짝이는 계곡에 도착했다. 지친 트럭의 시동을 끄고, 나는 수풀이 우거진 계곡으로 내달렸다. 그 어떤 근심과 걱정도 없이 그저 해맑게 뛰었다.


박진권




산과 들 그리고 바다

쉴 틈 없이 흐르는 계곡물 위로 웬만한 집만큼 널찍한 정자와 그 옆에 사방이 막힌 천막이 딱 붙어 있었다. 정자에 누워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있으면, 피곤하지 않아도 잠이 솔솔 왔다. 청량한 계곡물 향기와 풀 내음을 맡으면 정신이 맑아지는 듯했다. 그곳엔 인위적인 향기도, 기분 나쁜 매연도 없었다. 오롯이 내 가족의 말소리와 웃음소리 그리고 숲에서 흘러나오는 동식물의 자연적인 소리만 존재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놀고, 다시는 먹을 수 없는 것처럼 먹고, 전원을 끈 것처럼 자는 것을 반복하며 즐겼다. 그렇게 입술 색이 퍼렇게 변할 때쯤 새하얗던 하늘도 어느새 연한 남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더 놀고 싶었지만, 추위에 몸이 덜덜 떨렸고,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만 놀고 물에서 나오라는 어른의 손짓에 이끌려 뭍으로 올라온 나는 아쉬움을 뒤로해야만 했다. 정자 옆 천막에서 젖은 옷을 벗어놓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옷을 다 입고 천막을 들어 올리니 어디선가 지글지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고기 굽는 냄새가 온 사방에 퍼졌다. 그렇게 많이 집어넣었던 뱃속이 텅 빈 것처럼 꼬르륵 소리를 내며 요동쳤다. 마치 3일은 굶은 아이처럼 게걸스럽게 고기를 먹어 치운 나는 누군가 쫓아낸 것처럼 정자에서 튀어나왔다.


짙은 남색으로 변한 하늘 아래 흐르는 계곡물은 낮에 본 것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어쩐지 두려움이 밀려와 나는 숲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작은 나뭇가지를 들고, 두꺼비, 독개구리, 참개구리, 도마뱀 등을 잡으며 놀았다. 나도 모르게 너무 깊은 숲으로 들어가려 할 때 어머니가 내 손을 붙잡았다. 어른들은 풀이 없는 공간에 장작을 켜켜이 쌓아 두고 불을 붙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타닥타닥하는 장작 타는 소리가 났다. 불은 순식간에 장작을 삼켰고, 어두워진 주변을 붉은빛으로 환하게 만들었다. 두 눈 가득 들어온 불길을 마주하니, 어느새 졸음이 밀려왔다. 나는 언제 잠에 들었는지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졌다.


멀리서 본 나뭇잎은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이었고, 하늘에 가까운 잎들은 거의 연두색에 가까웠다. 짙고, 연한 녹색과 중간 정도의 녹색들 그리고 이제 막 태어난 것 같은 연두색과 사춘기에 접어든 초록색이 있었다. 누군가의 눈엔 그저 단일한 색상으로 보일지 몰라도, 내 눈에는 형형색색으로 보였다. 녹색인 것은 분명하지만, 모두 다른 녹색이었다. 나에게 있어 그 계곡은 인간으로서 기억의 시작점이다. 그 녹색의 향연이, 비로소 나를 사람으로 만들었다.


책과 학교는 자연의 계획과 동떨어진 인위적인 교육 기관이므로, 젊을수록 자연스러운 교육 기관에 열심히 다니는 것은 매우 합목적적이라 하겠다. -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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