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벌레도 없고 청량한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겨울을 좋아한다. 추위가 가시고 어여쁜 꽃들이 만개하는 봄도 선호한다. 온 세상이 푸르게 물드는 여름을 언제나 기다린다. 오색 찬란한 낙엽이 즐비한 가을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살을 에는 추위가 고통스럽기도 하다. 꽃가루 알레르기에 재채기가 심해지는 봄이 힘들다. 여름의 무더운 더위와 시도 때도 없이 흐르는 땀을 생각하면 찝찝함에 인상이 써진다. 왠지 모르게 울적해지는 가을은 선뜻 선호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글 박진권
집 밖으로 나왔을 때 이른 아침의 겨울 냄새는 어떤 향수보다도 향기롭다. 청량한 겨울 공기는 머리를 맑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12월과 1월을 보내고 2월이 찾아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이제 곧 겨울이 끝난다는 아쉬움보다도, 언제 이 추위가 가실지에 대한 바람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사람은 겨울이 곤욕일 때가 많다. 냉랭한 집안 공기에 부지런함도 이불속으로 숨어버린다. 강인한 정신력도 아이의 속살처럼 연약해진다. 그렇게 따뜻한 봄을 애타게 기다린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봄의 포근함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다. 더 자주 산책할 수 있고, 예쁜 꽃도 볼 수 있다. 수풀에서 일광욕을 받으며 편안하게 낮잠 자는 고양이를 보면 봄의 도래를 실감한다. 그러나 공기 중에 떠다니는 꽃가루는 나의 비염을 더욱 악화시킨다. 한 번 재채기가 나오면 끝날 줄을 모른다. 어디서 생산되는 것인지 작은 코에 담아둘 수 없는 콧물이 생성된다. 따뜻해졌다고 방심할 때 갑작스레 꽃샘추위가 찾아오고, 추적추적 비까지 흩뿌린다. 이럴 거면 차라리 빠르게 여름이 오길 기원한다.
이른 아침에도 방안 전체를 채우는 햇살에 스르르 눈이 떠지는 여름. 나태해진 정신이 부지런해지는 계절이다. 옷도 가벼워져서 외출이 덜 귀찮아지고, 아침에 덜덜 떨면서 씻을 필요도 없다. 소소하지만 가스비보다 저렴한 전기세 덕분에 세금 걱정도 조금 줄어든다. 물과 관련된 온갖 스포츠와 놀이가 성행하고, 오래간만에 소중한 가족과 연인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매번 피부에 발라야 하는 선크림이 귀찮기도 하다. 더욱이 땀까지 흘러내리면 선크림 덕분에 찝찝함이 배가 된다. 무더운 더위에 금방 지치고 짜증이 올라온다. 언제 그칠지 모르는 비에 속옷까지 젖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대한민국인지 동남아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세상이 빨리 붉게 물들었으면 하는 소원이 생긴다.
사색하기 좋은 계절, 오색 찬란한 낙엽이 무수히 밟히는 가을. 독서인에게는 가장 좋은 계절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깊은 사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독이 주는 창의성에 감탄하고, 외로움을 버틴 나는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기도 한다. 무더운 더위가 식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면 찝찝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그렇게 방 안에서 원하는 독서와 작문을 끊임없이 해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나, 갑자기 찾아오는 우울은 막을 도리가 없다. 깊어진 사색에 우울의 구덩이도 더욱 깊숙해지기 때문이다. 우울해진 인간은 나태해진다. 그렇게 나는 또 다른 시작을 위해 다시금 겨울을 기다린다.
눈앞에 있는 것, 구체적인 것은 쉽게 전모를 살펴볼 수 있어서 언제나 단번에 매우 강렬하게 작용하는 반면, 사상이나 논거는 조금씩 충분히 생각하려면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 그 때문에 언제라도 사상과 논거를 완전히 눈앞에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심사숙고해 삶의 안락함을 단념했지만, 안락한 상태를 보면 그것에 자극받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혀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비판에도 우리는 마음이 상하며, 전혀 무가치하다고 여겨지는 모욕에도 분노한다. -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