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이유
꿈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게 좋다. 본인이 누구보다 성실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그 꿈은 원대해야 한다. 꿈꾸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것을 다 이룰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것은 상식적으로 이루기 어려운 꿈을 가장 멀리 두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단기적인 작은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루기 어려운 꿈은 노벨 문학상 수상이고, 비교적 쉬운 단기 목표는 ‘매일 쓰기’다. 원대한 목적도 없이 매일 쓰기는 어렵다.
글 박진권
하루에 1,000자씩 쓰면 한해에 약 365,000자가 된다. 그렇게 10년, 20년, 50년을 쓰면 약 1,800만 자다. 책으로 환산하면 대략 150권 정도의 분량이다. 작은 목표가 원대한 꿈을 이룰 수 있게 만들고, 원대한 꿈은 그 작은 목표를 지속할 수 있게 돕는다. 서로 상생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왜 이 짓을 해야 하지?’라는 의문은 끊임없이 생성된다. 여러 이유를 들어 그 의문의 불씨를 잠재워도 계속해서 피어난다. 아주 조금만 방심해도 꿈이라는 방 안에 의심의 연기가 자욱해진다. 그리고 어디선가 불신이라는 타는 냄새가 진동한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혼란한 세상 속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함이다. 탁하고 얼룩진 내 영혼이 조금이라도 깨끗해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길을 직시하고, 가기 싫은 가시밭길을 감내하고자 함이다. 평소에 가지고 있던 신념이 글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작문 중간중간에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다. 작문은 내 자아를 유지하도록 돕는다. 유지된 자아는 조금 더 살아보자는 희망으로 현현한다. 두렵기만 했던 어두운 인생이 작문이라는 암순응 덕분에 용기가 생긴다. 그렇게 반복된 글쓰기가 안온한 일상을 만든다.
어떻게든 살아만 있다면 평생 글을 쓸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글은 살아내기 위한 수단일지도 모르겠다. 노벨 문학상 수상조차 그저 수단일 수도 있다. 어쩌면 1,800만 자 그 자체가 나의 꿈일지도….
개개인은 자신이 소망하는 모든 것 중에서 극히 작은 일부분밖에 손에 넣지 못한다. 하지만 수많은 재앙은 누구나 당하게 마련임을 항시 명심하고 우리의 소망에 하나의 목표를 세워 욕구는 억제하고 분노는 제어해야 한다. 즉 한마디로 말해 ‘단념하고 견뎌 내야’ 한다. 그러한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부와 권력이 있다고 해도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호라티우스가 의도하는 바도 바로 그것이다. 일을 하는 틈틈이 항시 글을 읽고 성현에게 물으라. 영원히 꺼지지 않는 욕구에 시달리지 않고, 득 될 게 없는 두려움에도 희망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