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나
모임이 버겁지만, 계속해서 참석한다. 심지어 직접 독서 모임을 만들어 사람을 모집하고, 그들과 교류를 이어 나간다. 최소한의 사회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적절한 사회성 유지는 소중한 사람에게 하는 실수를 대폭 줄여준다. 집구석에 틀어박혀 인간을 미워하기만 하면, 결국 내 사람들에게도 화마가 번진다. 세상을 증오하고, 타인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그 냉기가 겉으로 선명하게 보인다. 타자의 말에 조금도 설득되지 않겠다는 완강한 의지의 표정은 그들의 갑옷이다. 본인의 말을 적절하게 멈추지 않고, 상대를 존중하지 않겠다는 무례한 말투는 그들의 검이다. 그들은 항상 콜로세움에서 싸우는 검투사처럼 삶을 살아간다.
글 박진권
좋은 사람 곁에 있으면 나 또한 괜찮은 사람이 된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조금 더 관대해지고, 더 많은 표현을 분출한다. 과거에 기계 같다는 말 또는 감정이 있냐는 말을 자주 들었던 나는 내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감정을 교류할 수 없다고 믿기도 했다. 무분별한 공감이 어렵고, 공감되지 않으면 감정까지도 상실하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상실된 감정은 행동에까지 영향을 끼쳐 사람을 굳어지게 만든다. 굳어진 인간은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없고, 딱딱한 사고에서는 틀에 박힌 말과 행동이 튀어나온다.
남들보다 감성적이지 않다고 해서, 감정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해만 된다면 누구보다 감성적일 수 있다. 심지어 소중한 사람에게 생긴 변고엔 나 또한 감정적이게 변하기도 한다. 세상에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면, 감정이 없는 사람은 없다. 타인보다 적게 감응한다고, 없는 게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공부를 잘하고, 운동을 잘하고,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게 아니듯 감정도 마찬가지다. 공감하는 사람이 있으려면,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물론, 후자가 악한 것은 절대 아니다.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데 제약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타인과 다르게 행동하고 그들과 상이한 말을 내뱉으니까. 그런 상황이 반복되고, 지적이 거듭되면 그 공간에서 탈출하게 된다. 사회는 그런 사람들을 도태되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랑해야만 한다. 인간은 탈출하기에 앞서 휴식을 갈망한다. 진정한 나를 보여 줄 수 있고, 그런 나를 외면하지 않는 타인을 찾는다. 가족과도 비슷한 타인을 찾았을 때 인간 내부에서는 긍정의 힘이 싹튼다. 더 견딜 수 있는 정신력이 샘솟는다. 그곳에서 함께 휴식하는 것이다. 당신에게만 보여 줄 수 있는 나, 그곳에서 치유 받는 우리. 그 휴식은 인간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든다. 한쪽으로 치우친 극단성을 잠재운다. 부정으로만 바라보던 사회가 생각보다 아름다운 구석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렇게 희망을 간직하고, 진정한 나를 마주한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서로의 정신과 마음의 동질성이나 이질성이 너무나 쉽게 드러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놀랍다. 아무리 사소한 일에서도 동질성과 이질성을 느낄 수 있다. 서로 전혀 관계없고 아무래도 상관없는 내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지라도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사람들 사이에는 한쪽에서 하는 거의 모든 말이 다소 상대방의 마음에 들지 않고, 그중에는 상대방을 화나게 하는 말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에 반해 동질적인 사람끼리는 무슨 말이든 즉각 일치감을 느낄 것이고, 이때 동질감이 크면 곧장 완벽한 화음으로, 즉 같은 음으로 융합할 것이다. -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