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흙
사회성을 기르는 것은 쉽지 않다. 가끔은 거짓에 수긍하는 척도 해야 하고, 이해되지 않는 일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무생물로 인식했다. 돌이나 모래 또는 흙이나 먼지 같은. 운이 좋으면 옥석이 나타날 것이고, 운이 나쁘면 굳은 개똥을 집겠지, 생각하며 체념했다. 타인에게 개똥으로 비춰 지지 않도록 노력할 뿐이다. 사실 그렇게 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너도 무생물, 나도 무생물 피해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글 박진권
돌과 타인의 차이를 움직일 수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했다. 외관적 특징 또한 명백히 다르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들이 돌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돌도 타인도 대화가 통하지 않고, 자아가 없는 것은 똑 닮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아를 면밀하게 관찰하기도 했다. ‘설마, 사람인데 자아가 없겠어?’라고 생각했다. 물론, 타자의 자아를 멋대로 판단할 권리는 내게 없다. 다음 사례를 보고도 그들에게 자아가 있다고 생각된다면 아마도 내가 틀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22살부터 31살까지 쉬지 않고 독서 모임에 참여했다. 모임에는 소수의 지식인과 지식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있었다. 다수로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고 싶은 사람이 모였다. 몇몇은 오로지 이성을 만나기 위해서만 참석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극소수의 특이한 사람들도 존재했다. 본인이 가지고 온 책에 대해 조금이라도 비판 섞인 이야기를 하면 금방 풀이 죽거나 기분 나쁜 티를 내는 사람이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책에 자아를 의탁하는 행위는 사실 이해하기 어렵다. 그들이 뱉어내는 질문은 늘 날이 서 있고, 첨예한 대립이 예상되는 이야기다. 그러나 본인이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갑작스럽게 입을 닫아버린다. 최소한은 사회성을 기르기 위해 개최한 모임에서 이런 사람들은 만나면 상당히 곤욕이다. 모임이고 뭐고 다시금 서재에 박혀 혼자 읽고 쓰는 생활이 그리워진다.
과거 한 참가자는 이런 질문들을 했다. ‘동덕여대 시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차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성소수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는 어떤 것에도 명확한 대답하지 않았다. 박 터지는 질문을 던지고, 본인은 뒤로 살며시 물러나는 것이다. 그런 행동이 반복되었을 때 나는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차별 금지와 자유 존중은 타인에게 피해가 없는 상태에서는 서로 상충합니다. 차별하는 사람을 차별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군인이 사람이 아니라는 책의 내용에 대해서 아무런 말씀이 없으신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이렇게 답했다.
“책 내용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런 생각은 각자 해야죠.”
그런 생각을 나누자고 개최한 곳이 독서 모임이다. 그는 내 질문에 역시나 대답하지 않았고, 이후 모임 1시간 내내 입을 닫아버렸다. 이 밖에도, ‘얼마 있으세요? 투자하지 않으면 거지가 됩니다. 꼭 투자하세요.’라고 말하는 사람, 맞는 정보와 틀린 정보를 교묘하게 섞어 1시간 30분 중 혼자서 1시간 10분을 떠들던 사람, 모임 이성에게 미친 듯이 추파를 던지던 사람, 그 작은 모임에서 파벌을 만들어 개인을 따돌리는 사람, 지킬 엔 하이드처럼 이중인격의 면모를 보여준 사람 등 자아가 없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돌로 보기 시작했다. 저기 자갈로 만든 주차장에 널린 돌 하나, 모래사장에 깔린 모래알 하나로 인식했다. 그들의 사소한 투정은 잠시 부는 바람이었다. 그저 앞섶을 꽉 잡고 여미면 될 뿐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구나 그것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간에 타고난 개성을 견디며 인정해야 하고, 그것의 종류와 특성에 따라 이용할 생각만 하면 된다. 하지만 개성이 변하기를 바라거나, 있는 그대로의 개성을 무조건 부정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나도 살고, 상대도 살린다’라는 말의 참된 의미다. 그러나 이 과제는 실행하기가 쉽지 않다. 여러 가지 개성을 지닌 사람들을 언제까지나 피할 수 있는 자는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