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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뭄씨 May 26. 2023

8주차. 남과 여(1) 임산부들의 은밀한 유희

재미로 보는 성별판별법


 기척도 숨죽이는 어둠의 시간, 밤 12시.

 설익은 밤눈 사이로 식칼에 맺힌 섬광이 번뜩입니다. 칼을 손에 쥔 검은 그림자가 휙 한쪽으로 사라집니다. 그림자가 향한 곳은 한기가 서린 음습한 화장실. 물방울 하나가 ‘똑’, 침묵을 가르며 비명을 지릅니다. 이윽고, 매캐한 연기가 나풀대더니 촛불이 타올라 거울을 밝힙니다. 거기엔 식칼을 애처롭게 입에 문 똑 단발 어린 소녀가 보이네요. 

 이윽고 그녀의 소름 돋는 ‘현타(현실자각타임) 장면’이 이어집니다.

 ‘와, 내가 미래의 남편 한번 보겠다고...!’


 다들 기억하시나요? 식칼을 입에 물고 거울을 보면 미래의 남편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얘기. 지금은 다소 우스꽝스럽게 들리지만, 어린 시절 꽤 저명한 주술이었습니다. 최근 뜬금없이 이 설화가 떠오른 건, 임신 16주까지 요맘때 임산부들 사이에서 맘카페를 중심으로 유행처럼 행하고 있는 어떤 민간설화이자, 속설 때문입니다.         


 입덧이 시작될 무렵. 아침 메스꺼움에 차마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빈둥거리던 중 습관처럼 맘카페로 손가락 출근했습니다. 임산부 동지들은 또 어떤 고충이 있나 이방 저 방 기웃거리다 보니 다소 생경한 제목이 눈에 보입니다.

 [‘기차소리’, ‘말발굽소리’]


 이 무슨 생뚱맞은 제목인가 싶었습니다. 지체 없이 클릭.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글쓴이는 여자아이를 원하는 상황인데 태아의 심장박동소리가 기차소리인지 말발굽소리인지 가늠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과학적 근본이 허물어진 이 난감한 질문에 난감했습니다. 근데 또 어떻게 심장박동소리가 기차나 말발굽 소리로 들릴 수가 있나 호기심이 생기더라구요. 영상을 클릭하고 귀 기울여 봅니다. 귀를 예민하게 곤두세워도 저에겐 그저, 그냥, 심장소리일 뿐이었습니다.     


 댓글을 봅니다. 전문가의 내공을 뽐내며 임신동지들은 능숙하게 ‘기차’와 ‘말발굽’을 구분해 냅니다. 댓글엔 글쓴이와 동일한 ‘말발굽’ 사운드였는데 어제 딸 판정을 받고 왔다고 합니다. 이런 ‘간증’ 글이 신빙성을 더합니다. 이쯤 되니 과학이니 신빙성이니 다 내던지고 순수한 나체상태의 ‘호기심’만이 내면을 점령합니다.

  ‘그래서, 우리 ‘땡귤’이는 남자야, 여자야?’        

  

· 기차소리: ‘츄크 츄크’ → 아들

· 말발굽소리: ‘구드닥 두그닥’ → 딸      

    

 유튜브를 보며 기초부터 공부했습니다. 기차소리와 말발굽소리의 미세한 차이를 숙지했습니다. 자, 이제 응용문제! 얼마 전 검진당시 받아온 우리 ‘땡귤이’ 초음파 영상을 재생해 봅니다. 아뿔싸, 어렸을 때부터 응용력이 부족하더라니..! 저는 수차례 돌려들어도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기차’와 ‘말발굽’의 늪! 옆에서 널브러져 있는 남편까지 동원해서 몇 번이나 들어봤지만 우리 부부의 청력은 ‘기차’로 듣고자 하면 ‘기차’로 ‘말발굽’으로 듣고자 하면 ‘말발굽’으로 정보를 산출해 냅니다.    



  내친김에, ‘심장박동법’은 포기하고 기존에 알던 성별판별법들을 동원해 보기로 했습니다. 한번 뻗친 성별에 대한 호기심은 쉽사리 거둘 길이 없었거든요. 우리네 조상들의 지혜와 현대 유사과학은 ‘심장박동법’ 외에도 많은 성별판별법을 양산해 냈습니다. 임신한 달과 산모의 나이의 조합으로 성별을 찾는 ‘중국 황실 달력법’, 임신 극초기 난황의 위치가 왼쪽이면 아들, 오른쪽이면 딸이라는 ‘난황위치법’, 12주 초음파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방법으로, 척추와 성기가 이루는 각도가 크면 아들, 평평하면 딸이라는 ‘12주 각도법’, 산모의 소변에 베이킹소다를 넣었을 때 거품이 많이 나오면 ‘아들’ 아니라면 ‘딸’이라는 ‘베이킹소다법’ 등등.     


 하나씩 차례로 가늠해 보지만 어느 하나 쉽지 않았습니다. 모두 벽에 부딪혔습니다. 황실 달력은 음력/양력으로 보아야 하는지, 배란일/임신판정일 기준으로 보아야 하는지부터 말이 달랐습니다. 난황위치법도 배 초음파냐, 질 초음파냐에 따라 판정법이 바뀌어야 했습니다. 각도법은 아직 12주가 되지 않아 적용에 무리가 있었고요. 베이킹소다법은 이게 거품의 양이 많은지, 적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거품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문득 화장실 거울 속 저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거기엔 흡사 식칼을 애처롭게 입에 문 똑 단발 어린 소녀와 닮은 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이어지는 ‘현타’의 순간.      


  사실, 저처럼 성별판별법 앞에 혼란에 빠진 임산부 동지들은 한 트럭입니다. 뭐 몰라도 어떻습니까, 다 재미로 보는 건데. 280일 임신기간 중 가장 극적인 명장면 Top3을 꼽으라면 단연, 임신확인, 출산, 그리고 성별확인의 순간이지 않을까요? 눈치 빠른 엄마들은 일찌감치 배가 불러오는 형태나, 입덧의 증상만으로 짐작을 할 수는 있겠지만, 대체로 임신초기 성별은 물음표의 영역으로 남겨 둘 수밖에 없습니다. 그 극적인 순간을 앞두고 일말의 힌트라도 얻어 호기심을 잠재우고픈 발버둥입니다. 사춘기 어린 소녀가 미래 남편의 얼굴을 궁금해하는 것처럼. 귀엽지 않습니까? 여하튼, 저는 잠시나마 입덧을 잊고 뭔가 몰두할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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