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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 잃지 않기

자식의 학습만큼은 남에게 미룹시다.

by 쎄오

우리 부부는 흔히 말하는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애초부터 약속한 것이,

자식이 학교 공부를 잘할 것이란 기대를 하지 말고 무리하게 가르치지도 말자.

너도 나도 못했는데 애한테 성공해 보이라는 건 욕심이고 염치없는 짓이다.


그래놓고 시작된 주말의 숫자 쓰기 지옥순례.

처음엔 재미로 아들과 숫자 1부터 10까지를 스스로 써보기로 했다.


이건 공부가 아니야~~
재미있는 놀이일 뿐이야^^


마음에도 없는 거짓부렁으로 아이를 속이고 관련 학습지, 칠판, 펜과 종이 등 온갖 장비들을 꺼내놓는다.

주변의 이맘때 6세(만 4세~5세) 아이들은 숫자 쓰기와 글자 쓰기 연습이 한창이거나 이미 곧잘 쓰곤 한다.

한글과 숫자를 정식으로 배워본 적이 없는 나의 아들은 당연히 숫자를 보지 않고 쓸리 만무했고 심지어 보고 따라 쓰는 것, 아니 그리는 것조차 제대로 해내질 못했다.


그래, 그럴 수 있어. 처음부터 잘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거야... 를 속으로 되새기며 마름침만 꼴깍 삼기코 있는데.

서로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다 눈이 마주친 우리 부부는 복화술로 대화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보고 따라 쓰는 게 안되는 거야? 머리가 나쁜 건가..?






일정 시간이 흐른 후 우리는 흡사 수능을 100일 앞두고 모의고사를 망쳐 대성통곡하는 고3 아이와 아는 문제를 도대체 왜 틀렸냐며 분개하며 소리치는 부모의 모습과도 같았다.

숫자 쓰기는 더 이상 하기 싫다며 못하겠다고 우는 아이.

도대체 이게 왜 안 되는 거냐며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는 인내심이 바닥난 두 어른.


처음엔 정말이지 가볍게 주말 시간 때우기 목적으로 시작한 것인데 이젠 양측 모두 오기와 고집이 생겨 분노하거나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특히 다른 건 얼추 되는데 절대 안 그.려.지.는 숫자 2.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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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모양이잖아.라고 설명도 해봤다가 같이 손을 잡고 그려도 보았다가 아무리 연습을 해도 되지 않는 마의 숫자 2.

도무지 그 이유가 궁금해 답을 찾고 싶었던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괜찮아, 처음엔 다 못하는 거야.
그래서 자꾸 연습하는 거고.
못해도 돼.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중요한 거야.






아들: (개미만 한 목소리로) 부끄러워.

엄마: 응 뭐라고? 부끄럽다고? 뭐가 부끄러워? 잘 못 쓰는 게 부끄럽다는 거야?

아들: 응...


아... 그거였구나

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부끄럽고 창피했던 거구나.

나 그 마음 뭔지 너무 잘 알잖아.

가장 고치고 싶어 하는 내 모습 중 하나.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내 기질 중 하나.

처음 해 보는 것이라도 어느 정도(?)는 수월하게 해 내는 모습이 멋진 것이라 생각했었다.

다른 사람에게 대단하단 말을 듣고 싶어 남몰래 연습하거나 또는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창피해 도움을 요청하거나 방법을 묻는데 주저했던 나였다.


처음엔 당연히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래서 더 많이 연습하고 필요하면 도움을 청하며 점점 더 잘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지금의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며 현재는 많이 달라졌지만.

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후진 모습은 어떻게든 숨기고 싶어 했던 나였고,

단번에 잘 써지지 않는 숫자 2를 어설프게 그리는 모습이 엄마 아빠에게 창피했던 내 아들의 마음은 나의 그것과 너무나도 똑 닮은 모습이었다.








이렇게 또 하나를 배운다.

아이를 설득시키기 위해 내뱉은 말이었지만 실은 나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은 말.


잘하지 못할 수 있어.
그렇기 때문에 더 연습해야 하는 것이고 무엇보다 끝까지 포지 하지 않고
꾸준히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한 거야.

KakaoTalk_20250526_112336683_02.jpg

그리고 우리는 마의 숫자 2 쓰기 연습을 몇 차례 더 해 보았다.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 세수를 하고 나온 아들이 지긋이 물어왔다.


"엄마, 나의 귀여움은 다 잊은 거야?"

역대급으로 분노하고 답답해하는 내 모습을 보고 이젠 더 이상 본인을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아이.

초심을 잃고 머리가 나쁜 거냐며 속으로 욕하며 비이성적으로 화를 냈던 나 자신이 너무나 싫고 죄책감이 들어 괴롭던 찰나 아이의 질문이 내 가슴에 비수로 꽂혀왔다.


그럴 리가.

머리칼 한올, 발가락 한 개

너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사랑하는데 잠시 그걸 잊었다 느끼게 한 엄마가 정말 미안해 사과할게.


불량 과자 하나에 저렇게 마냥 행복하고 순수한 아이한테 참 못할 짓을 했구나 하며 반성할 기회였다.


그리고,

내 새끼 공부는...

역시 남의 손에 맡기는 것이 정답이구나를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끼게 한 주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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