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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과 양육에 대한 고찰

53개월 경력직의 이야기

by 쎄오

나의 첫 아이가 태어난 지 만 4년 하고 5개월이 되었다. 고로 나는 53개월 경력직 엄마다.

전업주부, 경단녀, 누구 엄마 또는 내 이름 석자 보다도 가장 나를 잘 표현하는 단어가 그저 '애 엄마'인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발버둥 쳤던 지난 4년.

둘째 출산을 70여 일 앞두고 있는 현재, 애처롭기까지 한 나의 지난 4년의 시간을 돌이켜 보았다.






직업의 사전적 정의가 생계유지를 위해 종사하는 일임을 감안한다면 아이를 낳아 키워내는 일은 직업이라기보단 '역할'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그렇게도 악착같이 돈 버는 일이 하고 싶었나 보다.

육아로부터 느끼는 효능감이 낮은 데다 직업이 없는 나 스스로를 너무 초라하다 느꼈으니깐.


여전히 나는 아이와 놀아주는 일에선 흥미를 찾지 못하고 있고 그 재미없는 일을 해내야 할 때면 심리적 부담과 압박을 엄청나게 갖는다.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도 까르르 웃어줄 준비가 되어있는 그의 동심 가득한 눈빛을 볼 때면 그 기대감을 어떻게 채워줘야 할지 도무지 방법을 모르겠을 뿐만 아니라 이것마저 내가 쳐내야 하는 일, To Do List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해야 할 일이라곤 꼴랑 한 두 가지가 전부인데 그것마저도 잘 해결하지 못해 허둥대는 일머리라곤 1도 없는 갓 입사한 신입 사원의 꼴이랄까.







아이를 상대하는 일보다 어른과 어울리고 대화하는 것이 훨씬 쉽고 편하게 느끼는 내가 그 사회를 벗어나 하루의 시작과 끝을 이 작은 인간과 함께하기로 결정한 데는 따지고 보면 나의 선택이 100% 영향을 끼쳤다.

육아휴직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불가피하게 비자발적 퇴사를 한 것이라 말해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 직업이 존재하는 어른의 세계에 남고자 했다면 어찌 다른 방법이 없었겠는가.


퇴사 직후 한 몇 년은 그렇게 셀프 위로를 하며 살아왔지만 지금에서야 좀 더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니 어디까지나 그것은 나의 결정이었고 그 결정의 근간은 크게 두 가지로 귀결된다.

내 어린 시절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정서적 이유가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내가 맡게 된 책임 영역 안에서 최우선순위가 이제는 아이 잘 양육하기가 되었다는 기능적 이유에서이다.

나의 소질과 재능 따윈 고려하지 않고 그저 워킹맘이 아닌 전업맘으로서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많으면 그것이 곧 '아이 잘 키우기'에 가까운 정답이라고 생각을 했으니...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바로 이런 상황에서 쓰이는 거겠지.






내 아이 또래의 남자아이를 키우는 워킹맘 고모와 함께하는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사정상 근 며칠을 독박육아에 감기로 아픈 아이의 병간호와 출근을 병행하며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 그녀가,

"드디어 내일이면 월요일이라 출근한다! (너무 좋아)"라고 했더니,

"A가 고모를 힘들게 하니깐 고모는 회사 가는 게 좋은 거지."라며 그녀의 속내를 까발려버린 만 4세 나의 아드님.

그 말을 들은 어른들은 모두 동공지진이 일어났고 이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하려 아무 말 대잔치를 하고 있는 와중에 아들에게 물었다.

"그럼 뿅뿅이는 엄마가 뿅뿅이랑 함께 하는 게 좋아서 저렇게 고모처럼 회사를 안 다니고 뿅뿅이랑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있는 것 같아?"


"응, 엄마는 나랑 같이 있는 게 좋아서 그런 것 같아."


그래, 그거면 됐다. 너만 그리 알아주면 됐다.

53개월 경력직임에도 여전히 허둥대는 신입 사원 같은 나의 효능감, 자존감 따위가 뭣이 중하겠는가.

어쨌든 내가 속한 이 작은 사회의 최고참이 인정해 주면 그것으로 된 것을. 4년 치 인센티브 받은 기분!


임신 기간까지 포함하면 근 5년 사이 가장 크게는 건강을 포함한 신체의 변화부터 사회적 지위에 이르기까지 나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고 그 과정에서의 부침을 이겨내며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 왔다는 사실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안다.

그간 수고 많았고 고생했다며 위로받고 보상받고 싶은 마음은 크지만 '유난 떤다', '생색낸다'는 말이 듣기 싫어 어른 세계 속 그 여느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셀프 위로를 하며 오늘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나.


명함이 없으면 어떻고 또 사회적 지위가 없으면 어떠하리.

이 작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세상이 곧 나의 소속이고 곧 있으면 이 비즈니스가 확장되어 또 다른 차원의 유니버스가 만들어질 텐데.

덕분에 나는 고용 불안 따윈 존재하지 않는 정년 없는 직장인!

(새로이 확장되는 그쪽 비즈니스 세계는 과연 어떠한 곳일까... 이번에는 사장이 여자라던데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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