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동 Feb 04. 2024

살인이면서 자살이자 동시에 사고인 것은?

<추락의 해부> 스포일러 없는 리뷰


빌어먹을 인연


이 영화의 주인공은 독일인 작가 부부 산드라(산드라 휠러)와 사뮈엘(사뮈엘 테이스)이다. 어느 독일의 외딴곳에 사는 두 사람. 두 사람은 아들 다니엘(밀로 다차도 그리너), 강아지 스눕과 함께 살고 있다. 귀여운 다니엘과 대학교수인 사뮈엘, 또 성공한 커리어우먼인 산드라를 보면 이 가족은 행복해 보이지만 실상은 다르다. 자주 다투는 산드라와 사뮈엘. 이 감정싸움은 산드라가 대학생과 대화를 나눌 때에도 역시 이어졌다.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 산드라와 조에의 대화를 방해하는 남편 사뮈엘. 산드라는 이제 따지고 싶은 마음마저 없다. 대학생에게 ‘다음에 만나자’라고 약속하고 그녀를 보낸다. 각자의 시간을 갖는 두 사람. 아들 다니엘은 이런 부모의 관계가 익숙하기라도 한 듯 스눕과 함께 산책을 나선다. 눈 밭을 몇 분 돌아다니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강아지 스눕이 이상한 행동을 보여준다. 킁킁 냄새를 맡으며 달려가는 스눕. 다니엘 역시 스눕에게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듯 강아지를 쫓아간다. 강아지가 이끈 곳에는 아버지 사뮈엘의 시체가 있었다. 시체로 발견된 사뮈엘. 그리고 유력한 피의자가 된 산드라. 산드라를 변호해야 하는 변호사 뱅상(스완 아를로드). 이 세 사람과 강아지 스눕은 길고 긴 법정싸움을 맞이한다. 과연 이 추락의 전말에는 어떤 이면이 깔려 있을까?


우리가 아는 법정영화는 아니야


이 영화를 두고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기생충>과의 공통점이다. 글쓴이가 <기생충>을 예시로 이 영화에 대해 설명하고 싶은 특징은 <추락의 해부>가 전형적인 범죄/스릴러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기생충>이 전형적인 장르물을 표방했다면 문광 부부의 존재가 그렇게 입체적이지 않을 것이다. <기생충>은 문광 부부를 통해 계층 구분을 박살 내며 이 사회에 도사린 문제를 탐구한다. 이 점에서  <기생충>은 목표를 충실하게 이룬 성실한 영화가 됐다고 생각한다. 본작 <추락의 해부> 역시 이와 비슷하다. 이 영화는 시작부터 한 남자의 살인사건을 묘사한다. 그리고 이 사건을 조사하는 경찰과 변호사를 보여주면서 포문을 연다. 살인사건 피해자의 아내가 피의자로 재판대에 선다. 여기까지 보면 그냥 일반적인 범죄물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첫 장면부터 강화시킨 토대를 바탕으로 어떤 것을 탐구한다. 이 떡밥은 첫 장면부터 읽을 수 있다. 주인공 산드라가 대학생과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이 대화는 원활하지 못한데,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이를 중심으로 플롯을 받아들이면 영화가 정말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체감할 수 있다. ‘이 것’이 <추락의 해부>에서 유달리 방해받는 느낌이 강한데 이는 감독 쥐스틴 트리에가 형식을 플롯에 녹였다고 볼 수 있다. 미스터리로 이야기를 끌고 가다 자연스럽게 인간 그 이면에 깔려있는 무언가를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전형적인 장르물에서 벗어났다는 점은 살인 사건이라는 소재를 다방면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어떤 관점에서 읽어도 합리적이다. 살인일 수도 있고, 타살일 수도 있고, 사고일 수도 있다. 이 <추락의 해부>의 각본은 이 세 죽음의 구분선을 흐려놓는 연출법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법정 장면을 연출하는 방식이 이 사뮈엘의 죽음을 다층적으로 읽을 수 있게 만드는 요소다. 빠르게 전개하고 싶었으면 전형적인 법정물처럼 더 쉽게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재판 장면은 실제 법정을 보는 것처럼 느릿느릿하다. 왜? 재판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최대한 많이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인물의 감정선을 폭넓게 담아야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두 가지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듦과 동시에 산드라와 사뮈엘의 관계를 비춘다. 이 유별난 관계는 사실상 이 영화의 모든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불완전한 관계를 통해 영화가 보여주고 싶었던 여러 소재가 빛을 발한다.


<결혼의 풍경>과 <살인의 해부>


사실 글쓴이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생각난 작품은 노아 바움벡의 <결혼 이야기>다. 이 <결혼 이야기>의 감독이 1973년 잉베르 베리만이 만든 <결혼의 풍경>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니 이 <추락의 해부>는 <결혼의 풍경>과 많이 닮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 <결혼의 풍경>과 <결혼 이야기>는 협력과는 저 멀리 떨어진 부부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이 영화 <추락의 해부> 역시 함께 같이 살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이는  부부가 등장한다. 이 부부를 둘로 가르는 소재가 흥미롭다. 이 두 사람이 갈리는 계기도 앞에서 쓴 <결혼의 풍경> 같은 영화를 인용한 흔적이 난다. 하지만 원작의 여부와는 별개로 이를 표현하는 방식도 고전적인 향을 풍기고 있다. 인물의 내면을 깊숙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글쓴이는 두 주인공의 직업과 관련된 부분에서 ‘고전적이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영화가 편집이나 음향 같은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뛰어나지만 인물을 그리는 방식에서 섬세하다고 느낀 것이 이 지점이다.


또 이 영화에 느껴지는 고전적인 향기는 <살인의 해부>라는 영화에서도 맡을 수 있는 것이다. <살인의 해부>는 1959년에 발표된 영화다. <12명의 성난 사람들>과 유사하게 법정에서 일어나는 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법정극을 통해 <살인의 해부>는 말 그대로 살인(자)과 관련된 일들을 나노단위로 분해하면서 인간의 한계와 사법제도의 단점을 폭로한다. <추락의 해부>는 <살인의 해부>가 사법제도를 비판한 것처럼 어떤 것에 대해 역설한다. 논리가 뭘까? 주장은 또 뭘까? 논증은 뭘까? 이 많은 것들을 통해 어떤 것이 증명되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직접 본 것이 아니라면 한계가 있지 않을까? 안다는 건 뭘까? <추락의 해부>는 이 부분에 대해 인간의 인지단계를 해부한다는 점에서 뛰어난 각본 능력이 빛을 발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영화를 담기 위해 살인사건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 역시 감독 쥐스틴 트리에가 선택한 좋은 수였다. 만약 살인사건이 아니라면 이 영화가 다루다 못해 병치시킨 두 가지 소재가 구현되지 않았을 것 같다.


쫓아가는 카메라


이 영화에서 글쓴이가 가장 좋았던 것은 촬영이다. 이 영화에서 앞/뒤/좌/우로 마치 틀이 있는 것처럼 오고 가는 카메라는 마치 관객을 법정으로 초대한 것처럼 움직인다. 이는 이 영화의 법정에서 산드라가 받는 대접을 생각하면 적절한 촬영방식이었다. 이 부분은 법정 밖에서도 그대로 이어간다. 글쓴이는 이 영화의 카메라가 관객과 다니엘을 일치시킨다고 느꼈다. 다니엘은 극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모르는 것을 새롭게 아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걸 안다'는 건 본디 불안정함을 내포하고 있다. 이를 그대로 반영하듯 카메라를 오른쪽으로 획 돌려서 시체가 발견된다거나 어머니 산드라의 얼굴이 어두컴컴 해진다던가 하는 장면이 몇 보인다. 이런 것들은 영화의 핵심인 인식에 관한 문제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을 보다 용이하게 끌고 간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다른 맥락으로 읽을 수 있어


글쓴이는 이 영화에 있어 '스눕'이라는 개가 의미심장했다. 이 스눕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적는다면 굉장히 큰 스포일러가 되니 다 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꼭 써야 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인간의 인식론을 떠나 여성영화로서의 측면도 있다고 글쓴이가 주장하고 싶기 때문이다. 비단 스눕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사건 구도만 봐도 이 영화가 가진 여성서사로서의 측면을 읽을 수 있다. 이 영화를 이루고 있는 많은 요소들을 주의 깊게 본다면 이 작품이 가진 풍부한 함유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추락의 해부>가 그냥 1차원적인 여성영화인 것은 절-대 아니다. 이 영화는 여성 영화로 읽을 수 있는 측면을 인물을 중심으로 다방면에 깔아놓고 있다. 주인공 산드라의 행적을 주의 깊게 본다면 이 영화가 가진 입체적인 특징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 여성영화로서의 맥락은 이 작품의 엔딩과도 관련이 있다. 많은 관객들의 입장에서 이 영화는 의문점이 많을 것 같다. 이렇게 쭉 달려와서 도착한 결론이 명확하게 끝나지 않는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괴물>처럼 강렬한 임팩트를 남기는 엔딩을 보여주진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의 엔딩은 사실상 이 <추락의 해부>가 끌고 가는 핵심 사건을 비유한다는 점에서 원형처럼 돌고 돈다. 산드라를 둘러싼 환경을 구도로 비유한 것이다. 이것을 한 여성 캐릭터가 당당히 주체적으로 서는 과정이라고 이해한다면 이 영화가 다르게 보일 것이다.



이전 23화 김성자 씨가 합당한 보상을 받는 한국사회를 꿈꾸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