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쉼, 두 번째 이야기
"요즘 연프 뭐 봐?"
"연프가 뭐야? 연예 프로그램? 한밤의 TV연예 같은 거?"
"내가 너땜에 못 산다. 한밤의 TV연예라니 언제 적 얘기야? 나는솔로, 환승연애 몰라? 연예 말고 연애!"
친구와 전화하다 한 소리 들었습니다. 애엄마가 연애 프로그램 모른다고 핀잔을 듣자니 억울했지만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연프를 몰라봤으니 지적받을 만도 합니다.
그런 제가 쉬는 동안 유일하게 본 연애!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바로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입니다. 풍부한 연애 경험과 넘치는 끼로 무장한 다른 연프 주인공들과 달리 외모는 훈훈하지만 행동은 어설프기 짝이 없는 모태솔로들의 연애를 그린 프로그램. 나는솔로의 전투력이 두렵고 환승연애의 쿨함이 어려웠던 제게 딱 맞는 초급자용 연프에 빠져 삼일 만에 정주행 했습니다.
좌회전 한 번 하는데도 진땀을 빼는 초보운전자처럼 기본적인 대화나 단순한 눈 맞춤에도 사정없이 뚝딱거리는 그들의 행동에 웃음에 터졌지만,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해 힘겨워하고 때로는 상대와 상처를 주고받는 모습에는 묘한 공감이 일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는 모태솔로 같은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 마음의 향방을 확신하기 어렵고 상대의 마음도 헤아리기 어려운 순간이 삶에서 계속 반복됩니다.
외모와 취향은 달라도 대화가 잘 통하는 관계.
좋은 건 나누고 싫은 건 삼가는 관계.
인생에 대한 고민과 경험을 터놓는 관계.
각자의 방향과 속도를 존중하며 격려하는 관계.
몸과 마음에 진정한 쉼을 주고 인생에 가치를 더하는 그런 관계를 삶에 들여놓기 위해 우리는 평생 애쓰지만 생각만큼 쉽지는 않습니다.
결에 맞는 사람을 곁에 두는 것.
그 염원을 이루려면 우선 자신부터 알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상대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줄 수 있는지 이해해야 제대로 된 관계도 맺을 수 있습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도 괜찮아요. 외모도 크게 중요하지 않고요. 하지만 사고는 확실히 열려 있으면 좋겠어요. 의견이 달라도 타협점을 찾고, 싸움을 오래 끌지 않는 사람을 원해요. 여행과 먹는 걸 좋아한다면 더 좋고요.
저는 솔직히 외모를 봐요. 단아하고 차분한 인상에 자기 관리를 잘하는 분이면 좋겠어요. 유머는 제가 담당할 테니 잘 웃어주는 사람이면 충분해요. 취미는 맞출 수 있지만 SNS를 과하게 하는 분은 어렵습니다.
적지 않은 소개팅을 주선하며,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자주 떠올랐습니다. 꼭 성사로 이어지지는 않더라도 자신을 잘 아는 이들이 결이 맞는 상대를 유독 빠르게 알아보고 관계를 명확히 정의하는 것을 자주 목격했습니다.
사람에 따라 좋은 관계의 기준은 다르다는 것.
보편적으로 좋은 사람은 있지만 절대적으로 좋은 관계란 없다는 것.
시간의 흐름과 경험의 축적에 따라 관계도 자연스레 변한다는 것.
이것이 수많은 관계들을 겪으며 제가 깨달은 사실입니다.
쉬는 동안 저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떤 사람들과 보내고 싶은지, 어떤 이들이 나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지 차근차근 적어 내려갔습니다. 속에 담겨 있던 것들을 글로 써보니 미처 몰랐던 솔직한 감정과 생각의 변화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습니다.
10대 때 친구를 사귀던 마음.
20대 때 연인을 만나던 기준.
30대 때 동료를 바라보던 시선.
그 모든 것들이 전혀 다른 모양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우연히 보았던 다큐멘터리가 떠올랐습니다.
유난히 사이가 좋은 90대 노부부. 70년이 넘게 결혼 생활을 지속한 그들은 아직도 서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이 색깔이 좋아? 저 색깔이 좋아?
이거 간이 어때? 소금 좀 더 넣을까?
상대의 사소한 습관까지 모두 꿰고 있는 그들은 그럼에도 여전히 서로의 감정과 생각의 변화를 세심히 살피고 있었습니다.
관계는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좋고 나쁨의 기준도 결이 맞는 사람의 모습도 계속 달라집니다. 그래서 관계를 잘 맺는다는 건 좋았던 관계를 끝까지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변해가는 나를 유연하게 따라가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관계가 편해야 결국 인생이 편해집니다.
나의 우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보내줘야 할 관계와 맞이해야 할 관계를 짚어봤으면 좋겠습니다. 관계들이 저마다의 자리를 찾을 때 쉼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찾아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