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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주 Jul 20. 2024

고수는 기척을 내지 않는다

영화 속 고수는 과장된 소리나 기색 없이 떨어지는 깃털처럼 우아하게 움직인다. 능숙하지만 극도로 절제된 그의 동작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목표물을 정확하게 겨냥한다. 그에 비해 오합지졸인 적군은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요란한 소리만 질러댄다.


직장 생활도 이와 같다. 풍부한 역량과 다양한 경험을 고루 갖춘 고수는 평소에는 일희일비하지 않지만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오면 확실하게 입장을 표명하고 기세를 돋우어 몰아간다. 그러나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살던 하수는 정작 결정의 순간이 오면 쭈볏거리며 뒤로 물러나기 마련이다.



직장 생활은 현실이고 우리 대부분은 강점과 약점을 모두 가진 범인(凡人)이기에 직장 생활에서 고수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그에 비해 하수를 만나는 일은 상당히 빈번하다. 


삼삼오오 모여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는 중에 회사와 동료들에 대한 비난을 끝없이 늘어놓는 하수는 쉽게 발견된다.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느끼는 불편함이나 지루함은 무시한 채 일방적인 폭격을 날리듯 뒷담화를 계속하며 직장을 당장이라도 그만둘 것처럼 으름장을 놓는다.


무릇 직장 생활이란 즐거운 일보다는 힘겨운 일이 더 많고 악독한 상사의 강림이나 예고 없는 구조 조정처럼 막막한 일도 생각보다 빈번하게 발생하기에 우리는 맘이 맞는 사람들과 하소연과 한탄을 나눌 수 밖에 없다. 산전수전을 겪으며 맷집이 제법 두둑해진 나도 신뢰하는 동료들 앞에서는 응어리진 맘 속 이야기를 흘려 보내곤 한다. 


그러나 평범한 우리가 힘든 감정을 쏟아낸 후 맡은 업무로 돌아가 본분을 다하는 것에 비해 하수는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불평불만을 토해내며 자신이 맡은 업무까지 소홀히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은 언제나 사직과 이직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누구보다 오랫동안 직장에 잔류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하수는 요란한 빈 수레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나는 열 명이 채 안 되는 고수를 만나 보았다. 어디서나 목격되는 하수와 달리 고수는 그 수도 적었지만 자신이 고수임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아 더욱 찾기가 어려웠다. 간신히 만나게 된 고수들은 연령과 성별, 직무와 성격이 모두 달랐지만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평소에는 유하게 보이지만 본인이 정해놓은 선을 넘을 경우 숨겨 놓은 발톱을 드러낸다는 것, 상사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정도로 차별화되는 역량을 갖추고 있으며 이를 신장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것, 대내외 네트워크를 나게 구축하지않지만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만큼은 확실하게 챙긴다는 것, 이직을 준비할 때는 소리 없이, 이직을 감행할 때는 확실하게 추진한다는 것. 


결국 고수는 업무적인 경쟁력과 자신만의 원칙을 확고하게 사수하고 있는, 소리 없는 강자였다.



사회초년생 때부터 영화 속 고수처럼 멋진 리더를 꿈꾸던 나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고수는 되지 못했다. 간신히 하수는 면했지만 고수가 되기에는 역량이나 성품이 모두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처럼 고수들을 찾고 그들을 닮아가고자 노력해 온 세월 덕분에 나는 부끄럽지 않게 내세울 수 있을 정도의 업무 역량과 나를 지지하는 적지 않은 아군들을 선물로 가지게 되었다. 


특히 나에게 가장 요긴했던 고수의 가르침은 이직 시 기척을 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몇 번의 이직을 진행하며 나는 준비 과정에서 들키지 않도록 극도로 신중을 기했고 준비 사실을 알고 있는 아주 가까운 지인들의 권유와 조언에도 내 속내를 완벽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나의 업무 역량과 인간적인 특성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나이고, 나의 행복을 가장 간절하게 바라는 사람도 나이기에 일단 휴직하고 잔류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그렇게 힘들면 연봉과 직급을 낮춰서라도 빨리 이직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지인들의 충고에도 나는 흔들리지 않고 조용히 나만의 기준에 따라 이직을 준비했고 다소 시간은 걸렸지만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우리는 얼마든지 흔들릴 있고 언제든지 실수할 있다. 그러나 실패를 반복하고 좌절하더라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면, 고수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나에게 맞는 방식으로 적용해 나간다면, 무엇보다 그런 과정들이 자신에게 뿌듯하고 당당하다면 우리는 이미 고수가 되는 길에 접어들었다고 있다.


인생에서 원하는 것을 획득하고 지켜내는 사람은 처음부터 강했던 사람이 아니라 결정적 순간에 필요한 역량을 갖추고 등장하는 사람이다. 영화 속 고수처럼 늘 완벽한 모습은 아니지만 부단한 노력과 성찰로 자신만의 강함을 확보한 현실 속 고수가 점점 늘어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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