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난주 Jul 06. 2024

최악의 추억 상자

모두에게 추억 상자는 존재한다.


여러분의 추억 상자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해맑게 웃고 있는 어린 시절의 사진, 단짝 친구와 함께 쓴 비밀 일기장, 첫사랑에게 받은 손 편지, 자녀가 만들어 준 색종이 카네이션, 처음으로 만들었던 나의 명함.


상자 속 내용물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담은 물건들을 보관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최악의 추억만 골라 담은 상자가 있다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그 상자를 열고 추억을 되새기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심한 경우 상자를 내다 버리거나 태워 버리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오죽하면 주인공이 부끄러운 추억을 삭제하기 위해 과거로 회귀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계속 나오겠는가. 


나 역시 삶에 있어 최악의 순간들은 다시 꺼내보고 싶지 않다. 가슴이 아프고 후회가 남는 추억들은 굳이 꺼내어 맞닥뜨리는 것보다 마음 속 수면 저 깊은 곳에 가만히 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직장 생활을 잘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최악의 추억 상자가 필요하다. 


단 이 상자에는 일과 관련된 추억들만을 한정적으로 담아야 한다. 사랑하는 이를 잃거나 무방비 상태로 당한 사고와 같이 삶의 의지까지 뒤흔들었던 추억들을 이 상자에 담아서는 안 된다. 


이 상자의 목적은 일에 있어 최악의 순간들을 되돌아보면서 직장 생활의 고비들을 넘길 동력을 얻는 데 있으므로 철저하게 일과 관련된 추억들만을 골라 담아야 한다. 


신입사원 시절 저질렀던 터무니없는 실수, 자존감을 마구 갉아먹었던 상사의 인신공격, 이직에 대한 잘못된 선택, 철석같이 믿었던 후배의 배신 등 유형으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나의 직장 생활을 몹시 힘들게 했던 추억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기록하여 최악의 추억 상자에 넣어야 한다. 



직장 생활이 너무 버겨울 때, 자신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고 한 없이 작아만 질 때, 당장이라도 사직서를 던지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을 때 최악의 추억 상자을 열어보길 바란다.   


나에게 이렇게 힘든 순간들이 있었구나

이런 고비들을 넘기고 여기까지 왔구나 

생각보다 나는 강한 사람이었어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네

똑같은 실수를 하면 안되겠네

이번에는 더 잘할 수 있겠어 


상자 속 최악의 추억들은 과거에 대한 후회와 아픔을 상기시킬 수도 있지만 그를 뛰어넘는 위로와 용기를 우리에게 선사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지혜를 전해줄 것이다. 



요즘도 나는 진상 상사가 납득하기 힘든 행태를 보일 때마다 일기를 쓰곤 한다. 증거 수집을 위해 기록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보다는 내 자신을 위해서 글을 쓴다. 


그가 했던 말과 행동들을 나열하고 그에 대한 나의 반응과 감정을 기재하다 보면 이런 어려움을 버텨 낸 내가 얼마나 굳센 사람인지,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더 효과적으로 대항이 가능할지 스스로 깨닫게 된다. 최악의 추억 상자는 무형의 추억을 유형의 물질로 바꿔 담는 과정에서부터 이미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셈이다. 



적어도 직장 생활에 있어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후회와 아픔에 얽매이지 않고 객관적으로 이를 성찰하고 상자 속에 모아 간직할 때, 그리고 위기의 순간 마법주머니를 열어보던 동화 속 주인공처럼 상자 속 추억에 조언을 구할 때 우리는 직장 생활을 보다 수월하게 헤쳐나갈 용기와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전 11화 눈은 밝게, 귀는 어둡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