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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주 Jun 22. 2024

수문장이 강한 이유

궁궐 앞에 버티고 선 수문장은 그 위엄이 상당하다. 그는 굳게 다문 입매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통행자들을 날카롭게 훑어보고 궁에 위해가 갈만한 자들을 선별하여 막아 선다. 그가 강한 이유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직장 생활에서 가장 강인한 사람은 수문장처럼 지킬 것이 분명한 사람이다.


먹여 살려야 하는 자녀가 있는 가장이 쉽게 직장을 그만 두지 못하듯 가족이든, 사회적 영향력이든, 돈이든 결코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존재하는 사람이야말로 직장을 꽉 움켜쥐고 버티는 법이다. 흔히들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거나 빚을 내서 집을 매입한 동료에게 "이제 회사 더 열심히 다니겠네."라는 농담을 건네곤 하는데 이는 농담을 가장한 진실이다.



영화나 소설을 보다 보면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 가장 강하다는 대사가 종종 등장하는데 직장 생활에서 이는 사실이 아니다.


지켜야 할 존재가 없는 사람은 언제든지 직장 생활을 쉽게 포기할 수 있다. 그들은 상황이 원만할 때는 직장 생활을 곧잘 해내지만 고약한 상사가 부임하거나 업무 부과가 심해지는 등의 위기 상황이 닥치면 빠르게 직장 생활을 정리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이들을 비난하고 싶진 않다. 오히려 이들의 감정이나 선택에 상당 부분 공감하며 때로는 부러움을 느낀다. 조금만 이상하거나 부당한 점이 있으면 미련 없이 직장을 떠나 버리는 이들로 인해 경영진들도 다소나마 경각심을 가진다는 측면에서는 고맙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우리는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속사정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다수의 사람들에게 결핍이 있듯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지켜야 할 것도 있다. 우리는 결핍을 채우고 잃지 말아야 할 것을 지켜내기 위해 오늘도 출근을 감행한다.



무언가를 위해 버틴다는 것은 어찌 보면 족쇄를 찬 듯 무겁고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존재를 위해 희생과 아픔을 감내하며 직장 생활을 이어 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다만 나는 본 과정을 족쇄가 아닌 선택으로 느낄 수 있도록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것들의 범위를 조금 더 확장했으면 좋겠다.


가족과 빚은 물론 절실한 존재이자 명확한 이유이지만 이를 넘어 조금 더 다양한 곳에서 지켜야 할 것들을 찾아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꿈꾸는 미래를 지켜내기 위해서, 개인적 상징성을 지켜내기 위해서, 보유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지켜내기 위해서와 같이 직장 생활을 지속해야 할 당위성을 더해주는 이유들은 충분히 많다.



사람은 현실과 이상이 조화를 이룰 때 가장 큰 안정감을 느낀다고 한다.


내가 선택할 수 없었지만 무엇보다 절실한 이유들과 절실함은 조금 떨어지지만 스스로 선택한 이유들이 조화를 이루어 나의 버팀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할 때 우리는 수문장과 같은 힘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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