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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주 Jul 13. 2024

지친 말은 바로 설 수 없다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현실로 다가왔다.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존재,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 존재가 상사로 부임한 것이다. 


직장 내 떠도는 소문 중 일부는 거짓이고 일부는 모함이지만 악의적인 상사에 대한 소문은 진실인 경우가 많다. 그는 소문대로 악랄하고 치졸했고 정당한 이유도 없이 직원들을 내모는데 도가 튼 사람이었다. 매일 같이 갖은 핑계로 직원들을 괴롭히는 그 덕분에 오랫동안 곁을 지켰던 직원들은 하나 둘씩 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직장에 헌신한 직원들이 도망치듯 퇴사를 결정하는 것을 보고 나는 반발하기 시작했다. 부당한 지시에 맞서 객관적인 근거자료를 들이밀고, 이대로 가다가는 조직이 완전히 붕괴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를 날리기도 했다. 



그런데 갈수록 힘이 빠지는 것은 그가 아니라 나였다. 속에 있는 말을 토해내고 계속해서 반격을 하는데도 나의 마음에는 갈수록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결국 병까지 나고 말았다. 


악질 상사라면 이골이 난 내가, 할 말은 하고 사는 내가, 이번에는 왜 이리 유난히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든 순간 나는 자진해서 주요 프로젝트에서 빠졌다. 지금은 공격을 감행할 때가 아니라 나를 돌아볼 때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바쁜 업무로 휴가를 낼 수는 없었지만 주말 동안이라도 잠시 시간을 갖고 나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위에서 괴롭히는 그를 대적하느라, 아래에서 신음하는 직원들을 돌보느라 나는 생각보다 훨씬 지쳐 있었다. 허기가 지고 진이 빠져 똑바로 서지 못하는 말처럼 나는 비틀거리고 있었다. 



직장 생활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와 같아서 좋은 요소와 나쁜 요소가 혼재되어 쉴 새 없이 튀어 나온다. 이런 요소들이 뭉쳐져 우리의 직장 생활을 천국으로 만들기도 하고 지옥으로 만들기도 한다.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상황을 예측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일기예보처럼 다가오는 날이 맑을 지, 흐릴 지 알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무리 사내정치에 능한 사람도, 남다른 통찰력과 식견을 갖춘 사람도 어둠 속에 방을 더듬듯 어렴풋이 징조를 감지할 수 있을 뿐 상황을 정확하게 예상하기는 힘들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직장 생활에서 나쁜 상황을 맞이했을 때 제대로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아무리 조심을 하고 만전을 기해도 상대방이 잘못하면 언제든지 당할 수 있는 교통사고처럼 우리는 나쁜 상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곤 한다. 연차가 쌓이고 직책이 높아져도 나쁜 상황에 휘말리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다만 오랜 기간 성실하게 직장 생활을 해온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조금 더 근성있게, 조금 더 차분하게 나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모든 상황에 대한 적절한 대처법을 숙지해서라기보다는 그럴수록 외부가 아닌 내면의 상태를 돌아봐야 한다는 사실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20년을 쉼 없이 달려온 나 역시도 여전히 나쁜 상황에 맞닥뜨리면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실수를 반복하곤 한다. 그러나 제대로 된 공격을 행하려면 일단 나의 상태부터 정밀 진단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처럼 부당한 상황일수록 우리는 자신을 조용히 들여다 보아야 한다. 


내가 얼마나 지쳐있는지, 어떤 점이 가장 힘든 지 정확히 파악이 되어야 다음 단계를 준비할 수 있다. 내가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너무 지쳐 있다면 그 어떠한 방법도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바로 설 수 없을 정도로 지친 말이 방법을 안다고 해서 바로 내달릴 수 있겠는가.


나의 상태를 올바로 파악하고 필요한 에너지와 휴식을 공급한 후에야 우리는 다시 달릴 수 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퇴사나 휴직을 당장 감행할 필요는 없다. 필요하다면 해야겠지만 지친 나에게 급격스러운 변화는 오히려 불안과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저 잠시라도 시간을 내어 나의 정신과 육신을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나쁜 상황을 당장에 타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컴컴한 구덩이 속에 갇힌 자신을 면밀히 파악하고 최소한의 에너지를 공급하여 버틸 힘을 확보할 수는 있다. 


작지만 필요한 힘이 확보되었을 우리는 비로소 제대로 공격이나 방어를 감행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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