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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쓰는 삶

by 난주 Mar 1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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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가도 없는 것, 없다가도 있는 것이 돈이라더니 참말로 그렇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고생 한 번 안 하고 자란 것 같다는 말을 지겹도록 들어온 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유복했던 유년 시절을 제외하고 나에게 있어 돈은 가만히 있으면 주어지지 않는 것, 온전히 내 힘으로 쟁취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찌감치 직업전선에 뛰어들었고 쉼 없이 경제활동을 이어왔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이기에 모든 상황을 여기서 다 풀어놓을 수는 없지만 어찌 되었건 오랜 기간 치열하게 노력한 덕분에 나의 지갑 사정은 상당히 개선되었다. 비록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사는 월급쟁이지만 그래도 혼자 힘으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는 것에 적지 않은 만족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수입이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아직 통장에는 약간의 저금이 존재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기약이 없다.


불안한 마음에 오랜만에 가계부를 써보았다. 공과금, 관리비, 식비, 교육비, 보험비, 그리고 수십 가지 등등.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지출 항목에 놀라고 무시무시한 액수에 또 한 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평소 쓸 때는 쓰는 편이지만 그 외에는 비교적 알뜰하게 생활을 꾸려왔다고 자부했는데 매달 너무나 다양한 이유로 너무나 많은 금액이 지출되고 있었다. 특히 외식비나 배달비, 쇼핑비 등 굳이 쓰지 않아도 되는 돈이 너무 쉽게 남용되고 있었다.


당장 나가서 아르바이트라도 알아봐야 하나 잠시 고민이 되었지만 아직은 어린아이, 한 번도 엄마와 마음껏 시간을 보내보지 못한 아이 곁에 충분히 있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일단 쓸데없는 지출부터 줄여보기로 했다.


매주 두세 번씩 했던 외식을 한 번으로 줄였다. 메뉴도 오마카세나 파인다이닝은 자제하고 있다.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치듯 지나는 길에 자주 들렀던 빵집과 카페도 한동안은 멀리하고 기분에 따라 형형색색으로 곱게 물들이던 손톱도 모두 지워 버렸다. 비용을 내고 다니던 사내 헬스장을 끊고 산책으로 대신하고 주 1회 이상 정기 의뢰했던 세차도 직접 해보고 있다. 이 외에도 수십 가지 소비를 제한하고 있다.



사고 싶은 것을 못 사면, 쓰고 싶은 것을 못 쓰면 우울할 줄 알았는데 나는 지금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운 소비 생활을 하고 있다.


집밥을 자주 먹으니 아이와 대화 시간이 늘어나고 속도 편해졌다. 네모난 화면을 보며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대신 자연의 아름다운 변화를 보며 산책을 하니 기분 전환이 절로 된다. 손톱을 칠하지 않고 머리를 자주 만지지 않으면 외적인 매력이 퇴보할 줄 알았는데 그 시간에 집안일을 하고 몸을 더 움직이니 혈색이 좋아져 오히려 생기 있어 보인다는 칭찬을 듣고 있다.


무엇보다 보다 근본적인 측면에서 나는 사고 싶은 것이, 쓰고 싶은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이미 사본 것이, 이미 써본 것이 적지 않아서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지금의 소비 생활에 갈증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줄어드는 통장 잔고는 여전히 속상하지만 그동안 방치했던 소비 습관을 이번 기회를 통해 바로잡고 나의 진정한 소비 성향도 알게 되었으니 이 또한 휴직의 또 다른 의미이자 성과라고 생각한다.


언제까지 나의 무수입 상태가 지속될 지는 미지수이지만 시간은 많아지고 돈은 없어지는, 나에게는 참으로 낯선 상태에서 또 다른 나를 찾아보는 소중한 기회를 당분간은 마음껏 누려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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