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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TAE Nov 23. 2020

누구나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한다.

Arrange Marker로 이해하는 일과 삶의 원리

얼마 전 송폼(Song Form)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송폼이라는 단어는 유재석의 ‘놀면 뭐하니’에서 처음 들어봤다. 직역하자면 노래의 틀이라고나 할까. 유재석의 드럼 비트로부터 시작해서 여러 코드를 얹어놓고 몇 가지 악기가 더해져서 조금씩 음악의 형태가 나오는 시점이었는데, ‘Colde’라는 뮤지션이 송폼을 만들어야 한다며 어레인지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곡의 구조를 만들고 전체의 서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하는 순간이 인상 깊었다. 곡의 테마를 잡고 나면 저렇게 구조를 만들게 되는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던 느낌이 남아있다. 그 작업을 얼마 전에 시작했다.



놀면 뭐하니  EP11


지난 추석 연휴기간 코로나 19의 여파로 어디도 가지 않고 집에 있었다. 아내는 게임을, 아들은 넷플릭스와 게임을 했고, 나는 내내 유튜브를 보면서 홈레코딩과 마스터링에 대해 공부를 했다. 물론 간간히 드라마 클립도 봐가면서. 유튜브의 정말 많은 고수들이 자신들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풀어내어준 덕분에 작업에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와 인사이트를 얻었다. 그중 하나로 로직 프로에서 송폼을 만들기 쉽게 하는 ‘Arrange Marker’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디로 입력하고 오디오로 녹음한 음악의 개별 트랙들을 인트로, 1,2절, 코러스, 브릿지, 아웃트로 등 큰 덩어리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Arrange Marker의 위치를 움직이거나 복사하면 그 덩어리 안의 소리들이 함께 정리되어 움직인다. 개별 트랙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수정하지 않고도 노래의 구조를 쉽게 만들 수 있는 기능이더라.


덩어리로 쉽게 움직이게 하는 것은 곡의 큰 그림을 보게 해 준다. 개별 트랙은 손수 입력하고 녹음한 것이라서 하나하나 아깝지 않은 것이 없다. 실수로 입력된 음이라 해도 내가 만든 것이라 애착이 간다. 하지만 노래를 큰 틀에서 구조로 바라보면 1절에서, 혹은 코러스에서 있어야 할 것과 아닌 것에 대한 구분을 하게 한다. 같은 코러스라 해도 1절 코러스와 2절 코러스의 느낌이 달라야 할 것인데, 거기에 들어갈 것과 아닌 것, 그리고 더 해야 할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로직 프로의 오른쪽 윗부분 verse, chorus 등을 구조화하는 것이 어레인지 마커이다.


건설을 하면서 업무를 통해 훈련되는 것 중 하나가 시간을 대하는 자세이다. 건설은 정해진 기한 내 목적물을 물리적으로 만들어 내는 일이다. 그렇기 위해서 공정표라는 것을 작성해서 프로젝트의 시작과 끝을 본다. 공정표에는 세부 액티비티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전체 일정을 구성한다. 세부 액티비티는 그 자체로, 혹은 여러 액티비티를 연결하여 중요한 일정을 마일스톤으로 구분하여 달성을 위한 일정을 표기한다. 지하 터파기 완료나, 1층 슬라브, 옥상 슬라브 타설은 언제까지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단위 액티비티를 좇다 보면 전체 일정을 잊기 쉬우나 그 큰 방향을 잊지 않게 해주는 것이 공정표이다.


보고서를 쓰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보고서를 쓰면서 정말 많이 질문받았던 질문은 ‘그래서 너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데?’였다. 보고서를 쓸 때면 보고해야 하는 주제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이해하고 나서 보고서의 구성을 고민하고 각 문단, 문장별 내용을 충실하게 반영하는데 시간을 많이 쓴다. 혹시나 숫자가 틀리진 않을까, 관련 내용에 오류는 없을까, 빠진 내용은 없을까.  쪽 글씨를 달기도 하고, 필요하면 표나 그래프, 다이어그램을 그려서 이해를 돕게 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모한다. 그러나 아무리 세부사항을 잘 정리했더라도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와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이 선명하지 않으면 좋은 보고서가 아닌 거더라. 윗사람이 읽었을 때 명확한 주장과 주제가 전달되어야 제대로 된 보고서이다. 그래서 세부 디테일도 중요하지만 끊임없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되물어야 한다.


삶을 살아가면서도 큰 틀에서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필요하다. 작년 본사에서 기획업무를 하면 여러 가지를 검토하고 진단하는 프로젝트를 했었다. 회사에서 어떤 부문을 진단하거나 검토하면 정말 다양한 방법과 시도를 통해 분석하고 결론을 도출한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나 자신에 대해서도 뭔가 진단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도해본 것이 <39세 인생 중간 진단 Project>였다. 업무, 재정, 신앙, 인생, 관계, 건강 등 중요한 영역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도를 했다. 혼자 하는 프로젝트라서 다양한 시도나 정밀한 분석은 쉽지 않았지만, 소홀했던 건강을 다시 챙기는 계기가 되었고, 미뤄왔던 치과 진료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돌아본다고 뭔가 바로 달라지진 않지만, 적어도 나아가야 할 방향과 좀 더 보완해야 할 것들을 이해하는 동력이 되었다.


파올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에 나오는 이야기 한 토막이다. 한 소년이 먼 길을 걸어 어느 현자의 말씀을 들으러 그의 집에 찾아갔다. 커다란 그의 집에는 많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지혜를 구하는 소년의 질문에 현자는 스푼에 기름을 한 방울 떨어뜨리고는, 내 집을 둘러보되 이 기름을 절대로 떨어뜨리지 말라고 당부한다. 다시 돌아온 소년에게 현자가 집에 대해 묻자 소년은 집을 돌아다니는 내내 기름에만 집중하느라 집에 무엇이 있는지 보지 못했다고 답한다. 현자는 괜찮으니 다시 한번 내 집의 아름다운 모습을 구경하라고 보낸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집을 한껏 즐기고 다시 돌아온 소년에게 현자는 묻는다. 기름은 어디 있냐고. 스푼을 보니 기름은 사라지고 없었다. 현자가 말한다. 내가 너에게 줄 지혜는 이것이라고. 인생을 살면서 아름다운 것을 충분히 구경하고 바라보라고, 동시에 너의 손에 있는 스푼의 기름을 잊지 말라고. 삶의 즐거움을 누리되 해야 할 일을 잊지 말라는 의미이지만, 큰 그림과 디테일로도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을 사는 것, 일을 하는 것, 음악을 하는 것,

모두 큰 방향과 디테일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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