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녘 연필소리 Nov 20. 2023

정보라의 <저주 토끼>, 인터내셔널 숏리스트 2022

모든 사람은 혼자다

[저주토끼 - 정보라] 모든 사람은 혼자다


무슨 생각으로 애한테 그런 것을 보여준거여. 나가. 다시는 오지 마. 새벽 한 시. 눈앞에서 쾅, 문을 닫아버리는 언니가 야속했다. 서른 즈음에, 댓살 먹은 조카들을 돌봐주며 잠깐이지만 언니 집에 얹혀사는 것도 서러운데, 그깟 <전설의 고향> 한번 같이 봤다고 밤마다 이불에 따뜻한 실수를 저지르는 딸을 저토록 걱정하는 것이 이해가 안 가서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이런 작은 동네에서는 6살이면 유치원에서 집까지 걸어 다닌다. 2살 터울 동생은 씩씩하게 재미있게 눈 한 번을 안 깜빡이고 봤는데, 그 옆에 누워 있던 첫째 조카는 바들바들 떨면서 화면을 봤던 것이 떠오른다. 결국 그날 밤부터 며칠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렇게 약하게 키워서 되겠어? 문간으로 걸어오는 언니 발걸음 소리가 묵직해서 소금이라도 맞을까 그녀는 후다닥 계단을 내려왔다. 첫째 조카는 멀리 들리는 새 울음소리가 슬픔을 뜻하는지, 기쁨을 뜻하는지 같은 것들을 물어보았다. 아서라. 애가 벌써부터 그러면 못써. 애들은 신나야지 자고로. 그래서 트로트에,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같은 노래를 들려주다 언니한테 걸려서 된통 혼난 적도 있다. 그러다 예의 <전설의 고향> 사건이 났고, 아이는 상상력을 귀신이 자기 주변에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 썼다.


오후에 잠깐 외출했다 돌아오는데 계단서부터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 일단 현관에 귀부터 바싹 댔다. 언니가 엄마야. 다시는 어디 가지 않을게. 나래 혼자 두고 안 갈게. 괜찮아. 아무도 해치지 않아. 하고, 두 조카 모두 목놓아 울고 있다. 이야기인즉슨 잠깐 같이 사는 아이들의 이모가 외출한 사이에 엄마도 장을 보러 나갈 일이 생겼고, 언니는 세상모르고 자는 첫째 조카는 두고 둘째 조카만 데리고 짧은 외출을 나간 것이다. 그 새 아이는 잠에서 깼고, 집에 혼자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 쪼끄만 것이 눈을 뜨면 구미호가 보일까 봐 눈을 꾹 감고, 동그랗고 노랗게 방바닥에 공포의 흔적을 남기며, 큰길로 나서 사람들 소리가 나는 작은방 창문까지 기어가, 창문에 매달려 엄마를 부르짖은 것이다. 과일 트럭 아저씨와 동네 아주머니들이 아이가 떨어질까 봐 아이 엄마가 올 때까지, 창문 아래에서 계속 말을 시키고 달래며 아이를 지켰다. 아이가 진정되고 아무렇지 않은 척 들어가서 가족이 모두 잠드는 밤까지 용케 버텼는데, 이제 별 수 없다. 언니는, 시간이 늦었다고 사정해서 내쫓지 않을 일이었으면, 애초에 사람을 쫓아낼 사람이 아니다. 이럴 거면 빨리 쫓가내지. 읍내에 아직 택시가 있을랑가. 초등학교 뒤편 골목길이 스산해서 그녀는 큰길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괜히 혼잣말했다.


늘 안전하다고 느끼던 시절, 아빠와 엄마가 만든 울타리 너머로 나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는 기껏해야 도깨비, 귀신, 망태기 할아버지 같은 존재들이었다. 기괴한 모습의 그것들이 실재할지도 모른다는 상상만으로도 오금이 저렸다. 물론 깜짝 놀라게 하고 무서움에 벌벌 떨게 하는 것이 어떻게 매력적인 문법이 된다는 것인지 여전히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는 공포를 포함하는 이야기에 더 이상 벌벌 떨지는 않게 되었다. 귀신을 두려워하던 아이들이 자라면, 왜 더 이상 귀신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일까. 아마도 상상력이 조금씩 무뎌진 탓이 가장 클 것이고, 한 치의 의심 없이 실재하고 귀신보다 더 가깝고 생존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는 위험요소가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상상력이 물러난 자리만큼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그 위협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포에 초연해졌다기에는 <기묘한 이야기>를 볼 때 여전히 옆에 앉은 아현이를 물고 뜯고, 난리 법석을 피우고 있지만, 공포감의 지속기간이 거의 하루를 넘지 못함을 인지하거나, 종종 혼자 <곡성>을 보면서 감상에 골몰하기도 하는 스스로를 보면서, 나 역시 이야기 안보다 밖이 더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끼고 있음을 실감한다. 요컨대 삶이 쌓이면서 미지의 존재 때문에 느끼는 공포심의 역치가 높아졌다.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는 미지의 존재 자체나 그것의 행위로 공포심을 자극하던 지난날의 공포소설과는 사뭇 다른 태도를 취한다. 귀신, 괴물, 환영, 환각, 기괴하지만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에는 늘 인간이 있다. 이 주인공들은 누군가를 저주하고, 자신 때문에 벌어진 현상에 무책임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남의 것을 빼앗고, 제 때 필요한 대처를 하지 못하고, 오로지 욕심 때문에 쉽게 창조하고, 피조물을 폐기한다.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인간적이지 못한 짓도 서슴없이 선택하고, 타인을 희생시키며, 웃는 얼굴로 신뢰관계인을 배신하고, 거짓말하고, 외로워한다. 그리워한다. 이런 인간들 틈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들은 이야기가 기괴한 낯을 띄고, 현재와 역사상의, 혹은 근미래의 인간의 삶이 비현실적인 색채로 빛나는, SF 공포소설로 기능하게끔 만들지만,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역할만을 수행한다. 그들은 메타포로 기능하여 인간들이 만드는 참혹한 현실의 일부를 가리고 판타지화함으로써, 표면적 공포가 증폭됨과 동시에 내밀한 공포가 시간차를 두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멀스멀 퍼져 나올 수 있도록 한다. 표면적 공포의 여운 끝에, 이야기의 민낯을 이해하면 서슬 퍼런 현실이 더 뼈 아프고, 피할 수 없어서 더 무서워지는, 내밀한 공포가 살금살금 스며들게 한다. 뒷맛이 찜찜한, 과학적으로 말도 안 되고, 현실에서 발생하기 어려운, 일반인이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의 이면을 짐작하다 보면 진짜 무서운 것들은 가까이에 있다는 감각이 모골을 송연하게 한다.


무엇보다 불가해한 존재들보다 인간이 더 무섭고, 타인에게 상처 준 인간들이 결국 카르마의 칼날을 받는다 하더라도, 남은 인간들은 여전히 아직 남아 있는 무서운 인간들 틈에서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 공포스럽다. 이 깨달음이 아름다운 겉모습으로 저주를 내리는 저주토끼보다, 발을 질질 끄는 할아버지 귀신보다, 모르는 아줌마를 엄마로 삼고, 엄마 대신 엄마의 배신자들을 처단하는 꼬마 귀신보다, 더 소름 끼친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모든 사람은 혼자다>를 통하여 "존재의 사실성은 무상적"이며, 사람은 예견된 죽음을 앞두고 살고 있을지라도, 죽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이유 없이, 목적 없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했다. 목적과 이유 없이 무상하게라는 방식이야말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발걸음이야 말로, 인간 본연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는 죽는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죽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어떤 순간에 섬광처럼 사라질 것이나, 그전에 생존하고, 선택하고, 실존하고, 오늘을 살 것이다. 시몬이 인간이 어떻게 살지, 그 고독함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이야기했다면, 정보라는 그 인간이 어떤 존재들과 상존할 것인지, 어떤 환경에서 실존할 것인지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인간의 선택적 숙명이 그토록 처연하고 두려울 수 없었다. 오랜만에 책을 덮고 오래 한기에 시달렸다.


수상이 불발되기는 했지만, <저주토끼>가 부커상 수상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구매했었다. 막상 받고 나니 저주의 효력이 어떻게 발현되는가의 문제는 둘째 치고, 누군가가 토끼를 매개로 누구를 저주하는 상황에 벌써 겁에 질려 책꽂이에 꽂아만 두었다. 그러다 주변에서 호평이 이어지고 가장 좋아하는 독서가의 리뷰도 보이길래, 이제는 읽을 때다 싶어져 책장을 봤더니 책이 온 데 간 데 없었다. 작은 방 어디에도 없는 것을 두 번 세 번 확인하고 나니까 혹시 벌써부터 저주가 시작된 건가 싶어 덜덜 떨렸다. 어디 갔을까. 점차 내가 책을 산 것이 맞나. 싶기도 했다. 몇 군데 인터넷 서점 주문내역을 뒤지고 나니 저주토끼가 떡하니 쓰여있었다. 더 무서워졌다. 언박싱 인증샷에 저주토끼가 떡하니 서있다. 작은 책 한 권이지만, 분명 이 방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 없으니, 방에 혼자 있기가 어려워졌다. 분명 여기에 꽂았는데, 나 정말로 기억나는데. 내가 빌려갔잖아, 따석아. 진짜 노답이네. 전화통에 대고 동생은 언니를 혼내고, 언니는 저주토끼의 저주인 줄 알았어. 정말 다행이야. 하며 내내 우는 소리를 냈다. 저주는 없었다. 아현이가 빌려가서 책이 제자리에 없었던 것이었다. 아현이가 책을 반납해 줘서 휴일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만에 작품을 호로록 읽고 부커에 거론되는 작품들 특유의 감각의 선연함, 특히 이 작품의 경우 그 공포가 느껴지듯 구체적인 것에 감탄했다. 무시무시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책 표지만 봐도 자꾸 생각나는 이 우스운 해프닝 때문인지, 상상력이 닳아져서 그런 것인지, 일상에 더 무서운 일들이 산재해서인지, 읽고 나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인지, 아니면 이 모든 이유 때문인지. 곧 무시무시함을 잊어버렸고, 위스키 세 잔에 행복이 가슴에 알알하게 맺히는 것을 느끼며 귀가했다.


<불편한 편의점> 이북 TTS를 틀어놓고 샤워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꺼졌다. 종일 나가 있는 통에 배터리가 다 되었다. 마저 씻으면서 <저주토끼>를 되짚다가 어릴 때 막내 이모가 보여준 <전설의 고향> 후유증이 떠올렸다. 귀신이 까룽까룽 눈앞에서 까불고 있을까 봐 무서워서 눈을 꼭 감고 낮은 포복을 했던 그 낮과 밤 사이를 기억했다. 나는 갑자기 오랜만에 어려졌고, 안전하지 못해졌다. 전설이 깃든 고향인지, 고향에 깃든 전설인지에 억울한 죽음들은 어떻게 해결됐을까. 나를 보고 웃는지, 우는지, 얼굴에 돋은 수많은 주름을 화면 가득 채우던 구미호는 어디에 깃들었을까. 한 맺힌 복수로 억울한 죽음이 해결되면 우리 삶은 그가 억울했던 만큼 나아지나. 참담한 일화 끝에 교훈이 흘러나오는 화면을 들여다보며, 솜털을 오소소 세우고, 저러지 말아야지. 저러면 안 되는 거지. 벌 받는 거지. 중얼거렸던 사람들은 그때의 결심 앞에 떳떳하게 살고 있을까. 전설의 고향 이후로는 그 어떤 고향의 전설도 전설의 고향도 없었던가. 실로 오랜만에, 두려웠다. 책을 덮으며 슬퍼하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했던 모든 것들이, 이토록 짧은 시간만에 익숙해지고 무뎌지는 것이. 이 관성이. 그렇게 만드는 현실이. 거기에 적응하고 굴복한 스스로가. 못 견디게 무서웠다. 책에 인덱스를 붙이고 잠깐 멈춰 그 의미를 생각하며 소름 끼쳐했던 모든 순간이, 반나절만에 몇 번이나 반감기를 거쳐 희미해진 것이 못 견디게 슬펐다. 휴대폰은 멈췄고, 나는 철저히 네모 박스 안에 혼자였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사람은 혼자다. 온몸으로 물방울을 맞으며 그 쓸쓸함을 오래 생각했다. 


*2022. 6. 3. 쓰고, 2023. 11. 18. 고쳐 쓰다.

*지난주 내내 바디프로필 촬영 때문에 운동에 집중하고 고생하느라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의 북에세이는 연기됩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전 03화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 201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