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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녘 연필소리 Nov 13. 2023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 2011

죽음에 보내는 찬가

[에브리 맨 - 필립 로스] 죽음에 보내는 찬가


엄마 무슨 일이야, 왜 그래?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 본가에서 집으로 돌아갈 채비에 분주하던 딸들의 손이 멈췄다. 얘들아, 할머니 돌아가셨단다. 외할머니를 10년간 보지 못했다. 비가 부스스 쏟아지던 날, 당신의 딸들이 쓰러지며 토해내는 울음을 배웅 삼아 할아버지가 떠났던 그때 이후로, 건강하던 외할머니를 10년이나 보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생에 대한 애착이 엄청난 분이셨다. 엄마는 당신의 아버지에 대하여 자주 이야기했다. 할아버지가 40년 가까이 공무원으로 재직하시며 오토바이로 출퇴근하셨던 것, 까맣고 멋있는 오토바이 뒤에 수박, 참외, 참조기, 같은 것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집으로 오셨던 것, 그러다 수박이 톡 도로에 떨어져 쪼개어져 버리면 그것을 노끈으로 동여매 아무렇지 않은 척 부엌에 가져다 두셨던 것, 매일 새까만 머리에 포마드를 얹어 한쪽으로 가지런히 빗고 정리하셨던 것. 내가 일곱 살쯤 되었을까. 엄마와 어린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민들레를 캐고 있었다. 민들레 달인 약이 그렇게 암에 좋다고 했다. 평생 담배를 입에 물고 살던 당신은 폐암을 진단받으셨다. 당신은 담배 대신 민들레를 비롯한 약초들로 달인 약을 입에 달고 살게 됐다.  생에 대한 강한 의지 덕분인지, 약초들 덕분인지, 할아버지는 양쪽 폐를 각각 반 넘게 절제하는 대수술을 받으시고도 20년 가까이 건강하게 생활하셨다.



할아버지의 생에 대한 애착은, 당신에게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당신만은 쉬이 삶과 단절되지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확신으로 이어졌다. 할아버지가 떠난 후, 작은 서랍에서 하나뿐인 아들과 당신을 위해 민들레를 캐던 딸들도 몰랐던 유산이 쏟아져 나왔다. 할아버지는 삶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그 수많은 재산이 주는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것은 정리되지 않은 유산, 그리고 정리되지 않은 규모 큰 유산을 둘러싸고 형제들이 공방을 벌인다는, 예기치 않았고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던 낡은 클리셰로 전개되었다. 마치 정해진 수순처럼. 동네 훈장 선생님이자 전국에 몇 남지 않은 선비 중에 한 분이었던 증조할아버지, 즉 엄마의 할아버지를 제외하면, 당시 산골 벽지의 시골 사람들에게는 남아를 제대로 장성시키는 것이 최고의 숙제고 자랑거리였다. 가장 큰 어르신이 깨어 있는 사람이었지만 외가댁의 풍토도 예외가 되지는 못했다. 할머니는 철저히 큰아들을 편애하는 양육방식을 고수했고, 당신이 평생 그러했던 대로 하나뿐인 큰아들의 전재산 상속을 철저히,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여름이면 다리 아래에서 송사리를 튀겨먹고, 겨울에는 작은방 구들장에 앉아서 간식을 까먹던 엄마의 형제들은 철저히 분열됐다. 그 후로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가을 햇살이 단단한 일요일이었다.



인생은 참 기묘하다. 누군가의 실수 혹은 나 자신의 실수를 관찰하면서 절대로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마치 농담처럼. 전속력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실수로 질주할 때가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몇 주 전, 엄마가 며칠 전에 할머니가 머무는 요양병원에 다녀왔다고 고백했던 날. 속으로 무척 어른들을 원망했다. 엄마가 나를 데리고 가지 않아서, 어른들의 싸움 때문에 나와 할머니까지 만날 수 없게 해서. 그 이후로 할머니의 마지막 거취, 당신이 어디에 머물고 싶을지에 대하여 홀로 긴 시간 고민을 거듭했고, 엄마와 동생들과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운을 뗐다. 엄마, 나 1년만 휴직하면서 할머니 집에 살면 안 될까. 할머니도 건강 괜찮아서 집에 계실 수 있으면 내가 보살피고. 나 한 번만, 딱 1년만 쉬면서 신춘문예 준비하고 안되면 깨끗하게 포기할게. 엄마가 허락할 리가 없는 제안이었다. 자포자기가 무엇인지 새로이 실감했다. 그래, 오빠가 허락할지, 엄마 건강이 어떨지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해. 할머니네 집 비어있으니까. 조금 더 일찍 용기내고, 조금 더 일찍 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면 어땠을까. 커피를 마시며 극적 협상이 타결된 다음 날, 할매는 삶과 단절된 존재가 되었다. 일주일만 빨랐더라면, 한 달만 일찍 용기 냈더라면, 10년 만에 보는 할머니의 얼굴은 수의에 둘러싸여 고운 화장을 한 얼굴이 아니라, 화장기 하나 없는 곱지 않은 얼굴이어도 생생히 살아 있는 얼굴이었을 것이다. 진작. 진작 보고 왔어얀디. 엄마의 읊조림 끝에, 더 빨리 마음먹었어야지. 속으로 쏘아붙여놓고. 나는 엄마의 실수를 반복했다. 모두가 그렇듯이.



할아버지가 그러하셨듯, 할머니 또한 생에 대한 집념과 애착이 남다른 분이었다. 나를 어매로 모시고 보살피는 눔한티 내 몫은 다 줄꾸마. 할아버지를 긴 시간 간병하면서도 억척스럽게 가계를 꾸려온, 그것도 큰 재산으로 불려내는 데에 성공한 야무진 사람이었다. 두 분 모두 남은 삶도 인간답게 살고자 했던 의지와 욕구가 강했고, 서글프게도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남편이 남긴 유산(그러나 대부분이 자신이 일궜을)을 두고 자녀들과 흥정했던 마음을, 나는 다 알지 못하면서도 안타까워하고 마음 아파한다. 대부분의 순간은 할머니를 잊고 살았지만, 때로 할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그런 할머니가 병원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 나를 견딜 수 없이 애석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한 만큼 죽음을 두려워했을 당신을 떠올릴 때마다, 그 손을 잡아주지 못했던 것이 나를 견딜 수 없이 비통하게 만든다. 필립로스는 <에브리맨>에서 한 노년의 생활과 그 스스로 그리고 그와 관계 맺었던 이들이 하는 그의 삶에 대한 반추를 통해, 사람이라면 모두가 겪어내야 할 삶과 죽음에 대하여 풀어낸다. 그는 죽음은 곧 나와 내 삶을 분리해 내는 메스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죽음에 가까운 존재들과 자기 자신에게서 삶에서 동떨어지기 시작한 점들을 발견하고, 이런 상태를 이질감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죽음은 일종의 비인격화이며, 자신의 것은 줄어들고 있기에 타인의 불행과 행복 앞에서 인색해지기도 한다. 그에게 있어 죽음은 삶에 대한 사보타주에 다름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딸 낸시에게 입버릇처럼 현실은 다시 만들 수 없고, 그냥 오는 대로,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의 세 번째 부인인 에레테가 병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모습, 그러니까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도, 또 그것이 지극한 허영심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의 삶과 죽음을 둘러싼 상반된 생각, 양립하기 어려운 관점들은, 그가 혹은 타인이 자신의 삶을 바라볼 때뿐만 아니라 그의 삶에 대한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발견된다. 예컨대 그를 싫어하다 못해 거의 혐오하는 두 아들들이 그의 연쇄 이혼, 연쇄 남편 생활을 바라보고 그에 대하여 버려진 아들로서 취하는 입장과, 그가 선택 당시에 처해있던 입장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괴리가 존재한다. 이는 그가 그의 삶에서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딸 낸시와의 관계에서도 발견된다. 본작은 같은 에피소드를 그의 입장에서 한번, 다른 이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다루는 방식으로 다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이 과정에서 그와 낸시의 생각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과 상대를 서로가 다른 무게로 자기 삶에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이로써 본작은 독자들에게 관점의 상이(서로 상 相, 다를 이 )가 비단 복잡한 현안을 대하는 한 사람의 내부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 밖에서도 벌어지는 일이며, 인간의 삶에서는 이 다름과 그로 인한 갈등이 지극히 당연한 것임을 반복해서 제시한다. 서운하다는 말에는 폭력적인 점이 있고(최은영의 단편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이에게 자신을 이해해 달라는 호소 역시 다를 바 없다. 그리하여 독자와 그는 존재의 다름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필연적인 상처를 그저 있는 그대로, 오는 대로, 현실을 다시 만들 수 없으므로 받아들여야 함을 깨닫는다. 난봉꾼이었던 그의 삶에서 사뭇 기만이나 모순처럼 보이는 입버릇, 현실은 다시 만들 수 없으므로 오는 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말은 비로소 그가 쾌락에 초점을 두고 중요한 선택을 남발하는 한심한 작자였다는 존재적 특징과 양립할 수 있는 것이 되며, 그의 삶을 이루는 서로 다른 생각들과 그가 품었던 여러 중요 가치관 중에 하나로 자리 잡는다.



나아가 그는 자신의 그림 교실을 찾은 다른 노인들에게 영감은 아마추어나 찾으러 다니는 것이며,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그의 장례식 때 낸시가 이야기했고, 여러 가지 버전으로 작품 내내 변주되었던 오는 대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문장과 일맥상통하며 수미상관을 이룬다. 그는 노년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평생 염원했던 전업 화가로서의 삶을 일구지만,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고민하지 못했기에, 얼마 못 가 창작활동의 고갈을 느낀다. 그리하여 앞선 독설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에게 쏟아붓는 것에 다름없고, 그가 결국 그저 자신은 일어나서 일을 하고, 현실을 살아낼 수밖에 없다는 결정에 가닿았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독자는 그의 아버지와 삼촌의 관계에서 형 하위와 그의 관계와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그와 사위의 관계에서 아들들과 그의 관계의 유사성을, 사위의 선택과 예술가 특유의 때로 주변을 해하는 젊음, 자신이 원하는 삶보다 예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한 태도를 보면서 사위와 그의 삶의 유사성을 발견하지만, 정작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지 끝내 스스로 묻고 대답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앞선 선택과 타인의 삶에서 선택에 대한 힌트를 얻지 못한다. 그리하여 철저하게 고독하고 유일한 고통에 홀로 남는다. 안타깝게도 그는 거의 인생 내내 잘못된 선택을 해왔지만, 그것을 이미 벌어진 현실로써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그가 가정에게 행한 배신행위가 해악이고, 그가 노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젊은 여성에게 집적대는 한심한 위인이라는 점을 떠나, 그에게 충분히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볼 기회 자체가 별로 없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누군가의 입장에 완벽히 일치하는 상황이 아닌 사람은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므로, 필연적으로 입장 사이에는 괴리가 발생하고, 이는 곧 각자의 고통으로 귀결된다. 유해한 선택, 그는 스스로도 잘못하고 있다고 인지하면서 끝내 그 결정을 하면서도 그에게는 선택을 피할 길이 없었고, 결국 스스로도 잘못된 선택에 의해 스스로 상처받는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본질적 자아를 탐구하고 자신이 어떤 의미로 살아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몰이해의 상태에 있다. 요컨대 그의 삶은 몰이해의 역사이고, 그 역사가 낳은 상흔의 집약이다. 본작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평범한 소년이었고 청년이었으며, 평범하게 죽음을 맞이한 평범한 한 사람의 이 일대기는 모두의 인생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이야기다. 에브리맨은 그의 아버지가 운영했던 공방의 이름이자, 공방에 쌓여 있는 수많은 시계의 시간들, 시계가 거쳐온 수많은 시계(때 시 時, 맬 계 系)의 총합으로, 보기 드문 여성편력을 가진 그도 결국 수많은 시계 안에서 평범한 인간 중에 한 명이었음을 역설한다. 뛰어난 미모와 젊음을 뽐냈던 에레테도 보통의 인간이다. 늘 친절하고 다정한 피비와 낸시 모녀도 보통의 인간이다. 본작은 눈에 띄는 특징을 가진 어떤 사람도 결국 평범한 사람이고, 보통의 인간이라면 모두가 본질적 특질이 아닌 한 어떤 성질 한 가지만 발현하며 살 수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에레테라고 해서 영원히 젊고 예쁠 수 없고, 피비와 낸시라고 해서 늘 다정하고 이타적일 수만은 없다. 어떤 증오는 그리움을 닮아 있다고 했던가. 사전적으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성격의 단어들이 병치하여도 결국엔 설명해 낼 수 있는 것이 인간과 그를 이루는 메커니즘이다.



필립 로스는 퓰리쳐상 수상자답게 미국의 노년들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다룬다. 그는 본작을 통해 노년에 대하여 대학살이라고 신랄하게 일축하면서도 죽음이 모든 사람들이 겪어내야 하는 삶의 일부이며, 따라서 죽음이 여전히 학살로 남아있지 않게 하기 위하여 사회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고민할 수 있게 한다. 이는 그가 <Indignation(울분)>에서 인간의 의지가 닿지 않는 운평의 파고와 감정의 물살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지. 우리는 어디로 어떻게 헤엄쳐 나갈 것인지. 우리는 어디로 어떻게 가라앉을 것인지. 가라앉는 것과 헤엄쳐 나가는 것 중에 어떤 것이 순리인지. 고민하게 했던 것과 비슷하다. 때로 어떤 삶은 걷잡을 수 없는 비극 그 자체고, <울분>의 마커스처럼, 본작의 '그'처럼, 그 파고에 몸을 맡기고 생을 인내하기도 한다. 그는 정답의 제시를 유보한 채, 그저 그런 삶도 있다는 것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부커 인터내셔널 수상작답게 더도 덜도 없는 사실적 묘사 속에서도 노년을 떠오르게 하는 바스러지는 노을빛으로 특유의 감각적 선연함으로 남는다.  



내가 겪은 죽음들, 많지 않지만 가까운 사람들의 떠남이 지나고. 내 안에 남은 것은 참담함과 슬픔보다 순리(순할 순 順, 다스릴 리 )에 대한 깨달음에 가까웠다. 우리는 모두 다르다. 모든 사람은 다르다. 그러나 다르지 않은 점도 있다. 선택과 무관하게 삶에 내던져지고, 또한 그렇게 살아낸 삶과 자신이 선택과 무관하게 단절된다는 것. 죽는다는 것. 우리는 모두 다르지만, 시작과 끝만은 같다. 물론 남은 자들은 떠난이들의 죽음이 동등하다고 생각할 수 없다. 누군가는 죽어도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머물며 가족과 쉽게 눈을 마주치지만, 누군가는 죽고 나서도 다른 이들의 발이 보이는 곳에서 쉬이 편한 잠에 들지 못한다. 누군가는 떠난 이가 머무는 칸에 꼿꼿이 서서 그리움을 전하지만, 누군가는 떠난 이와 눈 맞추기 위해 한참 허리를 숙여야 한다. 조예은의 <테디베어는 죽지 않아>의 주인공은 떠난 엄마의 납골당에서 죽음마저 불공평하다는 것을 절감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언젠가, 삶과 단절되어야 하는 숙명을 짊어진 것만은 같다. 같다고 해서 평등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관절들이 삶의 주체에게 똑같이 주어진다는 점으로, 삶은 아주 조금이나마 공평해진다.



공방 에브리 맨에서 그의 아버지는 작은 다이아몬드들을 섬세하게 감정하고 다듬어 백 달러짜리 반지에 박아 넣어 뉴욕에서 작게 새 출발 하는 신혼부부들에게 판매했다. 시간이 지나 그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루페로 다이아몬드를 들여다보고, 흠집이 없는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그의 정부에게 선물한다. 에브리맨의 재고 전체의 값과 맞먹는 가격의 반지가 파리의 밤으로 점멸한다. 에브리 맨에 등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루페로 들여다보며 돌본 다이아몬드와 샹젤리제의 고급 보석상에서 취급하는 다이아몬드의 가격은 후자 쪽이 훨씬 비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자의 가치가 후자의 것보다 못하다고는 할 수 없다. 시장의 가격은 다이아몬드의 현금적 가치를 표상할 뿐, 보석의 의미와 그 의미 때문에 보석이 갖는 가치는 그것을 다듬고, 선물하고, 받아서 마음으로 간직하는 사람들만이 정할 수 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당신들의 삶의 자세를 모두 지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작은 돌을, 자신의 삶을. 단단한 다이아몬드로, 손때 묻은 귀한 이야기로. 삶에 애착을 가지고 제련해 왔던 길을 존경한다. 그들은 삶에서 유리(떠날 유 遊, 떠날 리 )되어 떠났지만, 그 단단하고 손때 묻은 이야기들만은 우리 삶에 남았다. 여린 유리컵도 중심을 잡고 단단히 서 있으면 깨지지 않는다. 생은 무망 하고, 몸짓은 무용하며, 인간은 속절없이 나약하지만, 이 잔 안에 무엇을 담을지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오로지 인간, 스스로 뿐이다. 수없이 그래왔던 것처럼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후회할 것이다. 죽음 뒤에 바보 같이 매일이 후회였다고, 슬픈 소회를 남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떠난 이가, 그의 삶에 대한 애착이, 사랑이, 그 여린 잔 안에 무엇을 담았는지가 이야기로 남는 한, 여전히 떠난 자들은 삶 속에 남는다. 떠남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이 슬픔을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오롯이 남은 자들의 몫일뿐이다. 생 중에 모든 끝에는 시작이 함께하듯이, 생 후에도. 끝에는 시작이 함께하리라 믿는다. 삶에 대한 애착은 삶 중에 죽음의 순간에 가장 맹렬하게 빛난다. 죽음은 삶에 대한 예찬의 좌절이 아니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설사 그를 기억하는 자가 없어질지라도. 우리는 죽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로 남기 위해서 산다. 그러니 생은, 오늘을 사는 것은, 이야기를 잣는 것은, 인간의 최종적 숙명인 죽음에 보내는 찬가다. 할매의 화장기 없는 생생한 얼굴을 이야기로 기억한다. 고된 삶을 기억한다. 외가에 가면 손주들의 손에 먹을 것을 쥐어주던 분주한 손을 기억한다. 삶을 지키려던 그 단단한 결심을 기억한다. 치열하게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의미인가를 물으며, 우리, 에브리 맨, 은 그저 오늘을 살아내자. 시계()를 지나 다이아몬드로 남기 위해.

이전 02화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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