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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녘 연필소리 Oct 30. 2023

한강의 <채식주의자>, 2016

무해한 선택

우리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구옥 빌라다. 30여 년을 똑같은 집에서 살고 있고 어쩔 수 없이 참 많은 에피소드들이 그 집에 묻어 있다. 특히 엘리베이터가 없는 탓인지 계단에서 다양한 사건 사고가 발생하고는 했다. 할아버지가 손녀를 보러 왔다가 노구로 계단을 내려가시다 크게 넘어지신 적도 있고, 그때 할아버지가 보러 오셨던 귀염둥이 손녀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대형사고도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계단으로 이어지은 짧은 복도에 서면 계단 쪽에서 빌라 바깥쪽으로 난 창문에 그림처럼 금산이 보였는데, 그 창문 너머로 산을 보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옥상에서도, 작은방에서도, 테러스에서도 산은 보였지만, 계단에 난 창문 너머의 산의 풍경이야말로 뭐라고 해야 할까. 제맛이었다. 그날 나는 다리 사이로 창문을, 창문에 한 폭에 그림처럼 걸린 녹색의 풍경을 보려다가 그만 다리 사이의 풍광으로 퐁당. 스스로 내던져졌다. 그리고 사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위기탈출 시에 취해야 하는 행위에 대한 의견들에서 자유로운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이 작은 타박상만이 몸에 남았다. 엄마의 증언에 따르면 자지러지는 울음소리도 계단에 흔적을 남겼지만. 



그즈음, 꼬마였던 나는 거꾸로 세상을 구경하는 것에 크게 매료된 상태였다. 다른 아이들처럼 정글짐이나 철봉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릴 만큼 대범하지는 못했지만, 틈만 나면 작은 엉덩이와 짧은 다리가 만든 사다리꼴 화폭에 맺힌 젯소와 그 위로 찬란히 부서지는 색채를 바라보는 일에 매진했다. 애석하게도 나는 몸과 마음에 주름을 새기며 피터팬으로부터 멀어지며 착실히 늙어왔고, 그날들의 내가 왜 그런 취미에 몰두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무처럼 보고 싶다는 소망만은 또렷이 기억한다. 어린 나는 나무의 머리는 뿌리라고 믿었고, 나무들이 서서 자는 것이 아니라 발로 하늘을 딛고 위태롭게 물구나무서서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엉덩이를 내밀고 가랑이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 된 어느 시점 이후로 나만의 풍경화를 그리는 일을 그만뒀지만, 요즘도 가끔 노을이 내리는 기지제에 아무도 없으면 거꾸로 세상을 내다본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볼 때, 똑바로 서서 세상을 바라볼 때와 다른 것들이 종종 풍경 속에 맺힌다. 내가 다시 그 은밀한 취미를 향유하기 시작한 것은 오래전,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만나고 나서부터다. 



2017년 2월, 지금보다 6년이나 거꾸로 세상을 보던 시절에 가까웠던 나는 본작을 읽고, '최근에 책을 덮고 이렇게 착잡한 때가 있었던가'로 운을 떼는 글을 썼다. 살면서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고. 그때나 지금이나 본작 뒤에 남는 착잡함의 원인에 대하여 나는, 날씬한 몸, 좋은 직업, 행복한 얼굴 같은, 오랜 세월 사람들이 만든 정상적인 삶의 기준에 억지로 나를 구겨 넣으며 해왔던 선택들에 대한 지독한 자기 연민과 남을 바라보며 정상적인 삶과 비정상적인 삶으로 잣대를 들이대던 폭력적인 자아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고기가 먹기 싫어 채식을 선택했을 뿐인, 내 위에 고기를 담기 싫었을 뿐인 수많은 사람들을 채식주의자라고 이름 붙이는 사회의 일원이라는 서글픔 때문이기도 하다. 누가 봐도, 명백하게, 평범했던 삶에도 갑자기 균열이 생길 때가 있다. 평범하다는 이유로 그 남자의 아내로 '간택'되었던 영혜는 돌연 나무가 되기로 결심한다. 고기를 먹지 않다, 말라가다, 광합성을 하다가, 곡기를 끊고는 서서히 나무가 되어간다. -그녀가 스스로에게 가한 자기 파괴적 행위가 폭력이 아니라고 편들 생각은 없다. 다만, 본작에서 영혜가 보이는 극단적 기행은 누군가는 평범한 누군가가 작품 바깥의 현실에서 내릴 수 있는 일반적이고 무해한 선택의 증폭 버전이다. 요컨대 작가는 특정영역의 DNA를 몇십만 배 증폭시켜 pcr 검사를 하는 것처럼, 평범한 우리 사회의 일원이 내릴 수 있는 평범한 선택을 증폭시켜 표현했을 뿐이다.- 그녀의 변화에 이름 붙여야 하기에 그녀는 채식주의자가 되었다가, 정신병동에 갇히고 환자로 불린다. 영혜는 어째서 비정상인가. 그녀의 선택은 왜 균열이라고 불리는가. 온전히 그녀의 선택만으로 이루어져야 할 그녀의 삶에서 그녀는 선택했을 뿐이다. 그 선택에 누가 어떤 자격으로, 채식주의자라는 이름을 붙일 수가 있을까. 그 선택에 누가 잘못되었다는 판단을 가져다 붙이며, 몇 가지 알약을 처방할 수 있는가. 편의를 위해 누군가에게 붙이는 이름은 이토록 당연하게도 폭력적이다.



어쩌면 나무의 심장이, 세상의 어떤 동물의 심장보다도 가장 세차게 뛸지도 모른다. 물구나무를 서서 다리를 하늘로 뻗은 채 심장 소리가 나무껍질 사이로 새어나갈까 숨 죽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퍼런 동맥이 보일까 무서워 잎사귀를 무성히 드리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 안의 그것이 나무가 되었든, 호모 사피엔스든, 코끼리든지 간에. 우리는 자신의 심장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 안에 숨 쉬는 그것과 눈을 맞추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규명하고 정의하는 것은 그런 호흡이 선행되어야만 가능하다. 타인의 안에 들어찬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일은 그의 몫이지 타인인 나의 몫이 아니다. 그 작은 박동이 만든 음악소리의 볼륨을 키우고. 춤을 추거나. 눈을 감고 발이나 고개를 까딱이거나.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선율을 나누거나. 그 요동치는 고요함 속에서 손만 잡고 있어도 충분하다. 요컨대 모든 것은 인생의 주체가 내리는 선택과 결과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실존적 자아로서 자아의 주체만이 할 수 있는 결단이다. 나는 그래서 다시 아무도 없는 옥상에 서서 마천루가 쏟아지는 별밭을 보기 시작했다. 호수에 서서 타는 듯한 노을을 배아래에 깔고 철렁이는 윤슬을 보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상관없었다. 무해하게, 나는 그저 세상을 보고, 그대로도 괜찮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한강은 세월이 지나 <흰>으로 또다시 부커상 후보에 오른다. 한강의 작품 세계 특유의 있는 그대로의 색채를 묘사할 때 발휘되는 힘을 느끼는 데에 있어 두 작품을 나란히 읽는 것만큼 좋은 일이 없다. 두 작품은 모두 주제의식을 계속해서 부각하는 색채사용이 적극적이고 입체적이다. 젯소 작업을 잘한 작품을 감상한 후 색채 자체에서 받은 감명과 잔상처럼 작품을 읽은 후에 상당히 오랜 시간 묘사와 색채가 감상을 지배한다. 본작이 내면이 긁혀 흐르는 피를 식혀 녹색 그릇에 담으며, 그릇의 남은 자리에는 오로지 내 안의 줄기에서 터져 나온 열매만을 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어떤 나무의, 단단한 소망의 결정체라면, <흰>은 인간의 살과 근육을 찢으면 쏟아져 나올 새빨간 색깔 사이로 희고 단단한 뼈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의 한숨이다. 본작은 오로지 색채만을 사용하여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비인간적인 자아의 흉폭함을 어떻게 마주하여야 하며, 그 비인간성에서 어떻게 자아를 분리, 독립시킬 것인지를 그려낸 점이 인상 깊다. 반면 <흰>은 독자에게 삶에 대한 처절한 질문을 던지면서도 동시에 '흰'색 같은 담담한 위로를 던지고, '흰'이라는 테마에 맞는 이야기를 치열하게 정렬하여, 마치 태초부터 흰 바탕 위에 존재한 활자처럼 작품이 '그저 존재한다'라고 느껴지는 점이 인상 싶다. 이 대조를 통해 있는 그대로의 것을 표현하는 것도, 또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다시 한번 증명된다.



2017년 그 시절의 나는, 착잡함이 서서히 가라앉고 감정의 앙금을 식혀 녹색 그릇에 담으며, 그릇의 남은 자리에는 오로지 내 안의 줄기에서 터져 나온 열매만을 담게 되기를 소망했다. 모든 나무들이 겪을 그 노고를 응원했다. 그 어린 소망과 응원이 무색하게도 물리적인 흐름에 비하여 시절은 그리 많이 나아오지 못했다. 알고리즘이 퍼 나르는 너무 많은 정보들 속에서 하루가 다르게 더 많이 알아서, 더 크게 다치는 우리의 슬픈 숙명을 생각한다. 더 많이 알아서 덜 다치고 싶은 여린 마음이, 무참히 상처 입는 장면들을 바라본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소망한다. 다른 나무에 열릴 그 열매들에게도 내게 내린 것과 같은 햇살과 빗줄기가 함께하기를. 열차에 올라탄 옆 화분의 나무가, 옆 자리의 호모 사피엔스가, 옆 자리의 코끼리가, 어떤 눈길로 바라봐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당연하다는 듯이, 열매가 열리기를. 나무의 뿌리가 머리라고 생각했던 어린 나를 생각한다. 어떤 편견과 선입관도 없이 그저 보이는 대로 보고 보고 싶은 방식으로 세상을 보던, 이제 기억나지 않는 시절 속에 잡히지 않은 사고의 회로를 더듬더듬 짚어본다. 다른 이들의 어떤 말들로부터도 자유로워서, 한 점 다친 곳 없이 세상에 굴러 떨어졌던 순간을 생각한다. 나의 세상에 골몰하면서도 타인에게 무해할 수 있었던 결정을 생각한다. 영혜는 채식주의자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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