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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녘 연필소리 Nov 27. 2023

존 밴빌의 <바다>, 2005

오랜 목숨

[바다 - 존 밴빌] 오랜 목숨


인간은 천성이라고 불리는 높은 항상성을 갖는 성질들로 이루어져 있고, 따라서 잘 변하지 않는다. 말이나 새의 도움을 받아 원거리 소통을 하던 먼 옛날부터 실시간으로 공유할 변화가 쏟아지는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역사는 늘 실수를 반복한다는 취지의 농담이 오래 살아남는 이유가 이런 데에 있다. 그러면서도 또한 인간은 어떤 거대한 사건, 인상 깊은 타인을 만나 결정적인 영향을 받고 짧은 시간 안에 인생의 항로를 바꾸기도 한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나 <컨택트>에서처럼 거대한 사건을 맞닥뜨리거나 딸과 같은 더없이 소중한 존재를 만나면 인생이나 인간의 생각이 변화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다. 그 사람과 같이 겪어낸 사건과 시간들이 아직도 내 속에 생생하다. 내 인생에, 나의 실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을 꼽으라면 당연히 처음으로 엄마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사회와 문화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가장 큰 체계는 단연 언어다. 따라서 어떤 존재가 사회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여 실존적 자아를 인식하고, 평생 향유할 문화의 첫인상과 그 가치를 결정짓는 데에 처음 언어를 전수한 자가 누구인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언어를 습득했는지가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엄마에게서 언어생활을 습득하고, 나아가서 나의 사회문화적 존재가치를 터득할 수 있었던 것은 굉장한 행운이었다.


엄마는 훈장 선생님이자 이 땅의 마지막 선비 세대 중 한 분의 손녀였다. 이 환경 덕분에 그녀는 자연스럽게 천자문을 뗐고, 한문 사용에 최적화된 언어생활 덕분에 적확한 어휘를 선택하고 단어와 문장을 직조하는 데에 지대한 긍정적 영향을 받았다. 엄마가 30세까지 갈고닦은 언어생활은 큰딸에게 자연스럽게 전수되었다. 똥, 엄마, 아빠 같은 기본적인 단어를 읽고 쓰기 시작한 직후부터 옥편과 국어사전이 내 책상에 놓였다. 중학생 때까지 피아니스트를 꿈꾸며 노상 피아노와 바이올린에 매달려 살았지만, 훌륭한 음악가가 되려면 음표 너머 텍스트를 이해해야 한다는 엄마의 가르침 때문에 악보만큼이나 많이 열어봤던 것이 옥편과 국어사전이었다. 나는 허수아비를 빨갛게 칠했다는 이유로 그림이 교정당하고, 점심때 김치를 꼭 먹어야 하고, 안 그래도 김치 때문에 속 쓰려 죽겠는데 밥 먹고 나서는 꼭 한숨 자야 하는 정형화된 미술학원, 어린이집, 유치원의 교육체계와 전혀 맞지 않았고, 매번 선생님이 보지 않을 때 집을 향해 뛰쳐나왔다. 엄마는 그런 나를 다독이거나 설득해서 되돌려 보내지 않았고, 허수아비를 왜 빨갛게 칠했는지 나래에게 물어보셨나요? 김치를 꼭 먹어야 하고 낮잠을 꼭 자야 하는 이유를 나래에게 설명해 주셨나요? 같은 질문을 남기고, 돌아온 딸을 홈스쿨링했다. 집과 음악 학원만 오가던 나는 우연한 기회로 지역 어르신들이 운영하는 향교를 다니게 되었고,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주말에는 향교에 나가서 엄마에게 전수받은 한문 실력을 업그레이드했다. 내 언어는, 내 세상은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또 누가 있나. 애증(愛憎)이 어떤 마음(心, 忄)인지, 숙명이 무엇인지 내게 가르쳤던 아빠와 동생들이 있다. 독서 논술을 가르쳐주셨던 고등학교 은사 최기재 선생님, 수포자였던 내가 수능 수리영역에서 3문제에서만 감점을 받는 기염을 토하게 만들었던 故 박대근 선생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아,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했던 사람들이 있다. 완전한 타인으로 만나 각자가 그리던 포물선이 만나는 한 점에서, 어떤 순간보다 찬란한 순간을 공유했던 연인들. 내가 나일 수 있도록 하는 순간들을 함께 겪은 친구들. 아직도 나는 조금씩 점점 넓어지고, 멀리 걷고, 다양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모른다. 나를 스쳐간 시간들과 사람들로, 가늠해 보는 것일 뿐이다. 요컨대 내 세상을 만든 사람은 엄마이고, 내 세상을 조금씩 넓힌 사람들은 많았지만, 나는 그 어떤 시간과 타인의 힘으로도 '바뀌지'는 않았다. 인간은 많은 자아를 가지고 있고 한마디로 뭉뚱그려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존재지만, 본질적 자아만은 새로이 건조(建造)하거나 고양시켜 가닿는 발전형의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어서 있는 그대로 발견되어야 하는 관념이다. 타인이 쉬이 영향을 미치거나, 정의(定義) 내릴 수 없는 실존의 본체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타인에게 의존할수록 필연적으로 불행해진다. 존 밴빌은 <바다>의 주인공 맥스는 자신의 의미를 정의하고, 자신의 변화를 주도하며, 본질적 자아 확인을 지휘했던 존재를 상실하면서,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에게 묻기 시작한다. 본작은 타인에게 자신의 실존을 내맡긴 여린 영혼의 일대기와 죽음의 반향(돌이킬 반 反, 울릴 향 響)을 그리며, 인간 실존의 의미와 그 한계에 대한 날 선 고찰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부와 명예에서 먼 거리에 있었던 존 밴빌에게 단숨에 부커상의 영광을 안긴 걸작으로 꼽힌다.


본작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첫 번째로 주인공 맥스가 자신의 사회적 존재 가치, 위치, 나아가 자신의 존재 의미, 실존적 자아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에 타인에게 의존했다는 점이다. 맥스는 어렸을 때부터 계급구조 내 이동욕구가 강한 편이었고, 청소년기 특유의 예민한 감수성과 최하층민이라는 자각이 결합하자 본능적으로 자신을 샬레에서 꺼내어 줄 부유한 가족을 알아보고, 그들과 가깝게 지내고 싶어 하게 되며, 결국 그것을 해낸다. 맥스는 그레이스 가족과 가까워지면서 풍만한 풍채를 가진 안주인 코니를 흠모하게 되지만, 그녀가 천박하다고 느끼자 순식간에 그러나 부지불식간에 그레이스 씨의 쌍둥이 남매 중 여자아이인 클로이로 관심의 대상을 옮긴다. 그는 그레이스네 쌍둥이 남매가 자신과 영 다른 가치관과 행동양식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그들이 보이는 행태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들이 품고 있는 생각 중 무엇 하나 정의롭다거나 옳다고 말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행동에 가담하고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일련의 사건 때문에 맥스와 그레이스 가족은 멀어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성인이 되고, 성인이 되고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애나를 만나 연애하고 결혼한다. 애나의 아버지는 애나에게 생각만큼 많은 유산을 물려주지 못했지만 맥스와 애나가 결혼을 결심하던 당시 맥스 눈에 보이기에는 엄청난 부자였고, 훌륭한 명성을 누렸지만, 사기꾼이었다. 정서적 학대의 징후와 재정적 무책임의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맥스의 어머니가 클로이네 가족과 애나를 싫어하고, 맥스가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배신이라고 부름에도 불구하고, 맥스는 끝내 클로이와 애나를 선택한다. 맥스가 의도적으로 클로이와 애나에게 접근하고 그들을 이용하려고 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맥스는 자신의 삶의 중요한 관절인 신분 혹은 계급 상승의 과정을 타인에게 의존하고, 이 중요한 변화를 내재적으로 이루지 못한다. 따라서 자신의 발전의 매개가 되었던 존재가 사라지자, 자신의 존재의미를 순식간에 잃어버리며 붕괴한다. 맥스는 자신이 추구하는 자아를 지탱하던 인물들이 삭제되자 이제야 자신은 누구이고, 내 인생은 어떻게 흘러왔고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고민한다.


두 번째로 작품이 맥스 자신과 주변의 다양한 인간들이 저마다 죽거나 죽음에 가까워지면서 인간 실존의 가장 큰 한계인 유한함을 인식하는 과정을 그리고, 이에 대해서 깊게 고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무용한 몸짓만으로도, 나아가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치 있다. 그러나 맥스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의미를 살아내고 싶은지 자문(自問)하며 살아오지 못했다. 따라서 미력한 행동들만으로도 존재의 실존에 의미가 있고, 그런 행동들이 모여 세계를 바꾸는 기적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모든 인간은 죽지만, 죽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도 불구하고 필생(마칠 필 畢, 생 생 生)의 의지로 하루를 살아내는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위대하다. 맥스는 애나의 죽음이 가까워지고 나서야 비로소 죽음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깨닫고, 계급 혹은 신분의 상승과 같은 변화에 선행되어야 하는 것들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기 시작한다. 또한 맥스는 맥스의 딸 클레어를 그저 사랑하고 귀여운 존재, 순결하고 순수하며 동시에 순진한 존재로 여기다가, 클레어야말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의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임을 깨닫고, 자신이 존재적 한계 너머에서도 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임을 인지한다. 그러니까 맥스 자신이 애나를 여전히 사랑하고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것처럼, 클레어만이 맥스의 실존이 삭제되고 나서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생각하고 그리워할 것임을 실감한다. 다행히 맥스는 이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의미를 규명하기 위해 자신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고, 쓰면서 표현한다. 또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 자신이 놓여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시간대와 위치를 끊임없이 탐색하고 확인하려 한다. 애나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는 변화한다. 누군가에게 더 이상 자신의 존재를 규정(법 규 規, 정할 정 定)당하지 않기로 하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묻는다.


본작은 장편이라기에는 분량이 짧고(243쪽), 부커상 수상 당시 내용이 없다는 내용의 숱한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는 점과 그 비판이 일응 이해 간다는 점에서 서사도 풍부한 편은 아니라고 할 것이지만, 오로지 스타일, 그리고 스타일과 내용의 통일성만으로 넓은 관찰과 깊이 있는 사유를 담아내고, 또 유도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측면에서 걸작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작품이다. 물론 예상치 못한 반전을 다수 포함하고 있지만 본작의 줄거리는 본 지면을 빌어도 약 5줄이면 충분히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짧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가 아니기에 복잡한 인간의 자아와 그에 따라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심리를 섬세한 필치로 따라간다. 부커상 수상작다운 화려하고 생생한 색채감과 세밀한 심리묘사가 눈 부시다. 따라서 독자 입장에서는 종종 맥스와 심리적으로 동기화되면서 이 복잡 미묘함 앞에서 아연해진다. 겉(스타일)만 화려하고 내용은 없는 껍데기 같은 작품. 존 밴빌은 이런 지적에 대하여 삶 자체는 복잡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섬세하게 표현하다 보면 작품 또한 복잡 미묘해진다고 설명한 바 있고, 따라서 본작은 맥스의 복잡한 인생과 심경, 현재 그가 하고 있는 고민들을 풍부한 어휘와 복잡한 언어로 세밀하게 지면에 옮긴 결과이며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복잡한 스타일로 현현(나타날 현 顯, 나타날 현 現)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거장들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메시지와 형식의 통일성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것이다. 제임스 조이스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모더니스트였던 존 밴빌의 작품답게 기존의 리얼리즘과 전통적 도덕, 신념을 부정하고, 인간성 상실을 맥스 개인의 입장에 초점을 두고 분석했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적 특성 또한 모범적으로 두드러진다.


인간은 모두가 죽고, 이 유한함 때문에 오늘이 더 의미 있다. 오늘이 무한히 이어진다면, 오늘 우리는 오늘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나는 누구인가. 복잡한 질문과 당연히 복잡해질 수밖에 없는 답을 찾는 과정을, 무수한 내일에, 혹은 속는 셈 치고 누군가 타인에게 맡기는 일이 그리 큰 위험은 아닐 것이다.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에서 언어는 인간의 생(生)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체계 중 하나로 등장한다. 외계의 언어를 분석하고 이해한 언어학자는 외계인의 사고방식과 문화, 시간에 대한 관념까지 순식간에 이해(이치 리 理, 깨달을 해 解)하게 된다. 지구에 '찾아온' 외계 존재들은 시간의 흐름을 선형이 아닌 원형으로 이해하고, 과거와 미래를 나누는 방식으로 시간을 분석하지 않는다. 언어학자는 외계의 시간관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신이 미래에 어떤 선택을 하게 되고, 그게 어떤 비극으로 이어질지 이해한다. 그러나 그녀는 비극을 맞지 않기 위해, 비극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아는 미래와 다른 선택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인간 실존의 유한성 때문에 단장지애(斷腸之哀)를 겪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딸을 낳고 그녀를 무척 사랑하고 온마음을 다해 아낀다. 인간은 시간 앞에 무력하지만, 그 무상함을 알면서도, 무위를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시간보다 위대해진다. 우리는 헤어질 것이다. 사랑했던 사람들과 스쳐 지나갔던 것처럼. 그러나 그렇다고 삶을 멈출 수는 없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지만, 주어진 삶을 유한하게 운영하는 것도, 내내 사랑으로 그래서 이야기로 남아 영원할 삶으로 만드는 것도, 모두 그 유한한 존재들이 하는 선택이다.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분투한 이 사랑 이야기는 오랜 목숨을 가질 운명을 타고났다. 숙명은 선택했기 때문에 그의 운명이 된 것이다. 내 삶의 시작은 엄마가 만들었고, 지금의 나는 나를 스쳐간 누군가들의 시간이 함께 만들었지만. 동시에 나는 온전히 나의 결정으로 변화하고, 유지하고, 나아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밤바다 한가운데로, 발을 딛는다. 누군가는 이것을, 인간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조소할까. 흔들리지 않고 걷는다. 누군가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인생은 복잡하고, 발 끝에 닿는 차가운 세상도 내가 선택한 숙명(오래된 숙 宿, 목숨, 운 명 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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