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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녘 연필소리 Dec 11. 2023

애니타 브루크너의 <호텔 뒤락>, 1984 (1)

글쓰기로 존재하기(1)

[호텔 뒤락 - 애니타 브루크너] 글쓰기로 존재하기


나에게 글을 쓰는 행위는 내가 나로 실존하기 위한 밑작업을 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고, 자기 자신이라고 하더라도 그 복잡함을 모두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에, 그 불가해에 닿기 위하여 나는 누구고 어떻게 살고자 하는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하필 글쓰기를 택한 이유는 게으르게도 관성 때문이다. 1990년대에 초등학생이었던 사람들이라면 공감할만한 풍경 중에 하나가 매일 일기를 쓰고 담임 선생님께 참 잘했어요 도장이나 짧은 코멘트를 받는 모습일 것이다. 글쓰기가 숙제였던 그 시절, 방학이 끝나면 지난 여름날들의 날씨가 어땠는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몇 주를 되새김해보기도 하고, 최대한 무난한 일상을 골라 한두 줄의 글에 크고 단순한 그림을 얹어 일기를 대신하기도 했었다. 숙제였던 일기가 일상이 되기 시작했던 것은 중학생 때부터였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숙제로 일기를 쓰던 시절이 남긴 습관 때문에, 그리고 공부를 시작하면서 나름대로 하루를 정리하고 다음날을 준비하는 데에 유용하다는 이유 때문에 매일은 아니었지만 꾸준히 일기를 쓰게 됐다. 인재숙에서 민근홍 선생님을, 고등학교에서는 최기재 선생님을 만나면서 일기에는 점점 독서 후의 감상을 정리하거나 독서논술을 준비하는 내용이 늘어났고, 대학생 시절에 잦은 일탈에도 불구하고 글 쓰는 일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수능 언수외 영역에서 역대 모의고사 중 최고점을 받으며 꾸준한 글쓰기 연습이 가진 힘을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말이 가지는 힘에 대해서 논할 때 자주 쓰이는 논거는 생각이 발화의 과정을 거치며 자신의 입장으로 공식화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발화의 내용이 자기 자신에게도 발화된 의견이 확실한 사실로 자리매김한다. 이보다 더 공고하게 의견표명을 사실화하고, 더 나아가 기록으로 남아 구속력을 갖는 것이 글을 쓰는 행위이다. 시대가 기록을 문자로 행하는지 여부에 따라 분기점을 갖는다는 점에서 글쓰기가 기록으로서 갖는 힘은 오래 공인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의 내가 누구이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기록하는 행위는, 글쓰기의 예상 독자가 자기 자신뿐인 일기가 그 장르일지라도 기록된 바가 확실한 사실인 것으로 공인한 것이나 다름없다. 나에게 있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어떤 책을 읽었는지, 어떤 영화를 봤는지,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를 기록하는 행위는 현재의 스스로에 대한 고찰이라는 총체를 이루는 중요한 구성요소다. 나아가 이런 종류의 기록행위로 인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스스로와 세상에게 확실한 것으로 공표한 것이다. 물론 시절이 고이면서 사람의 생각은 변하기 마련이고 입장 표명을 예전의 것과 달리 하는 것으로 예전의 글쓰기와 그에 따른 사실은 수정될 수 있지만, 근본적인 사고가 완전히 천지개벽할 수는 없으므로 그 범위는 자연스럽게 제한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글쓰기는 아마추어에게도 똑같이 어렵고 힘든 일이다. 애니타 브루크너의 <호텔 뒤락>은 주인공이자 작가의 메가폰 역할을 수행하는 작가 이디스가 자신의 상반된 페르소나를 서로 다른 이야기에, 다른 포맷을 활용하여,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나의 생각을 투영하여 이디스이해하자면 이디스는 자신의 주체적인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 즉 실존의 이룩을 위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모습을 글쓰기를 통해 확인하고, 그것들을 서로 견주는 세심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는 지금 사방이 녹색인 도시, 태국의 치앙마이에 있습니다. 일주일째 여행하고 화보집 발간을 준비하면서 독서가들을 위한 월간지 <새벽녘 연필소리> 12월호를 위한 연재분 작업까지 했더니, 이 글을 제때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잠시 딴소리지만, 이번 12월호에는 최진영 작가님의 <단 한 사람>을 다룹니다.)

구독해 주시는 여러분들의 너른 이해를 구하며,

치앙마이의 풍경으로 미력한 글을 대신합니다.

본 연재분의 미완성 부분은 다음 주에 계속 연재됩니다.

모두,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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