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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녘 연필소리 Dec 04. 2023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 인터내셔널 롱리 2022

차가운 위로

[대도시의 사랑법 - 박상영] 차가운 위로  


전주는 퍽 평온한 도시다. 서울에서 12년을 살았고 그 삶이 정력적이었기 때문에, 이 고즈넉한 도시에서의 생활이 상대적으로 더 평화롭게 느껴진다. 다리를 건너려면 앞 차의 꼬리를 물어야 하고, 대중교통의 막차 시간에 맞추기 위해 술을 위에 털어 넣고 뛰어야 하고, 그랬는데도 막차를 놓치면 택시를 잡기 위해 카카오택시를 열 번쯤은 돌려야 하고, 지나는 택시라도 잡아타기 위해 연석에 앉아 아슬아슬하게 온몸을 휘청이는 취객들을 지나 도로로 온 팔을 던져야 하는. 전장 같은 대도시. 서울. '서울은 다정한 지옥'이라던가. 안시내 작가가 피드에서 김연수 작가의 표현이라고 밝히며 인용했던 것으로 기억하는-가물가물하다- 이 구절에, 나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었다. 서울은 그런 곳이다. 다정하지만, 지옥 같은 곳. 나는 불이 꺼지지 않는 그 대도시를 뒤로 하고 전주로 왔다. 헤어짐의 아쉬움을 담은 눈물 한 방울도 없이. 6개월 간 같이 일했던 부장님과의 이별 앞에서는 한 시간 넘게 울었으면서, 10년 넘게 함께 한 서울과의 이별에는 어쩜 그렇게 초연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때 지쳐있었다. 


이곳에서의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요가를 하고, 씻고 출근 준비를 하면서 전자책을 음성으로 듣는다. 출근 후부터 퇴근할 때까지는 고되지만 소화할 수 있을 만큼의 업무를 수행하며, 퇴근 후에는 다시 전자책을 음성으로 들으면서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두 시간을 들여 신중하게 웨이트 트레이닝과 유산소 운동을 한다. 운동이 끝나면 집에 돌아와 집안일을 하고 씻으면서 전자책을 듣고, 얼굴에 앰풀을 한가득 올린 상태로 글을 한 편 쓴다.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일기를 쓰고, 30분간 영어 공부를 하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책을 읽는다. 어떤 불필요한 감정 소모 없는, 조용하고 평온한 일상이다. 간단하지만 두툼한 질감으로 가득한 이 루틴과 그것을 둘러싼 이웃들의 다정한 관심이 나에게 얼마나 따뜻한 위안이 되어주고 있는지 모른다. 반면 서울이 주는 위로는 차가운 다정함에서 온다. 수많은 사람들, 오늘이 지나면 다시 보지 못할 인연들, 적당한 무관심으로 서로를 대하는 친구들, 동료들. 바에 앉아 바텐더와 시시껄렁한 농담을 나누거나, 사뭇 진지한 상담을 하면서도 느껴지는 거리감만큼이나, 빽빽한 사람들 틈 사이에는 몇 광년이 숨어 있다. 그리고 이 틈에서, 자신이 보통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철저히 소외받는 이들이, 되려 그 무관심에서 다정한 위로를 받는다. 차가운 다정(多情)함. 그것이 다정한 지옥이라는 서울의 본질이다. 


기원적으로는 이상하다, 기이하다는 의미로 strange, peculiar, odd 등의 단어들과 동의어로 쓰였던 단어 queer(퀴어)는 20세기에 들어 동성애자를 비하하거나 경멸하는 용어로 사용되다가, 1980년대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전개되면서 성소수자를 포괄하는 단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재는 우리가 통칭 LGBT(AI) Q+ (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Asexual, Intersex, Questionery, and more)라고 부르는 정체성을 포괄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다. 이 다정한 대도시는 새롭게 정의된 Queer 뿐 아니라 Queer의 본래적 의미였던 이상하고 기이한, 남다른 사람들까지. 그러니까 Queer의 역사를 이루는 모든 '남들과는 다른' 이들에게 골고루 차가운 다정함을 나눠준다. 모든 사람은 서로 다르다. 세상에는 나와 똑같은 타인은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나는 어떤 타인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거꾸로 나는 타인으로부터 완전한 이해를 받을 수 없다. 인간은 고독을 타고났다. 누구 하나 경계에 서있지 않은 사람이 없다. 다만 어떤 이는 넓은 경계선을 밟고 서있고, 어떤 이는 이를 꽉 깨물고 집중하지 않으면 한순간에 미끄러져버릴 만큼 좁은 경계선 위에 있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경계인이다. 부커 인터내셔널 롱리스트에 노미네이트 된 작품 <대도시의 사랑법>은 좁다란 경계선 위에 서 있는 '퀴어'들이 차가운 다정함을 주는 대도시 서울에서, 어떤 사랑을 하고, 어떤 삶을 살며, 어떤 인정을 하고, 어떤 인정을 받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밤이 내리면 한강은 꼭 도토리묵 같다.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모양을 배에 새기고 누워 있는, 까만 도토리묵처럼 생겼다. 본작은 어떤 선택과 마음이 옳고 그른지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도토리묵 같이 고요하고 묵직한 한강처럼 시간을 타고 티 안 나게 흐르며, 대도시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저 지켜본다. 퀴어들이 하기에, 퀴어할 수밖에 없는 사랑 이야기들을. 


도로 가득 쏟아지는 사람들, 의미 없이 가볍게 오가는 목소리들, 웃음들. 외로운 개인은 그 사이로 잠시 스며들어와 묵직한 인장을 남기는 타인과 찰나의 순간에 접촉을 맺고, 금방 무장해제 되고 만다. 본작은 화자 '영'이 무장해제 된 순간과 자신의 마음의 빗장을 푼 인연들이 제각기 다른 모습의 사랑으로 남게 되는 과정을, 마치 별 일 아니었다는 듯이 캐주얼하고 솔직하게 표현한다. 신기한 것은 그의 다른 작품들이 그러하듯, 그의 작품을 읽는 어떤 독자라도 그 가벼운 질감과 구어체적 표현 속에서도, 화자의 깊은 감정 속을 직접 걷고 충격을 온몸으로 흡수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상적이라고 해서 가벼이 지나가지 않는다. 본 소설집에는 연작소설 <재희>,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대도시의 사랑법>, <늦은 우기의 바캉스>가 엮여 있다. 각 작품에 등장하는 화자 '영'은 내내 같은 사람이기도, 각 작품에서 서로 다른 사람이기도 하다. 이는 우리가 다른 우주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되어버리는 것을 표상하기도, 동시에 우리는 늘 같은 사람이지만 어떤 상대를 만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양의 사랑을 하고, 전혀 다른 형태의 감정을 겪는다는 것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영이 느끼는 흔들리고 뒤집히는 감정과 인지를 독자도 함께 느끼고, 그 꼬집어 표현할 수 없는 다름과 다름 속에서도 고고히 유지되는 다름의 동일성을 함께 인식하게 된다. 


각각 떼어 놓고 보아도 훌륭한 작품인 네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단연 사랑이다. <재희>는 어떤 남자와도 섹스할 수 있는 재희와 게이 영의 동거를 그리며, 영이 재희를 이성으로 사랑할 수는 없으나, 친구이자 인생의 동반자로서 진짜 사랑하게 되는 풍경을 담는다. 대학 동문들은 재희의 결혼식에 등장한 영을 보고 기이한 삼각관계에 혀를 내두르거나 비웃지만, 이들의 내밀한 속 사정을 지켜본 독자만은 타인이 이해하지 못하고 보편적인 관점에서 아름답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음을, 우리에게는 타인의 다름에 가치를 매길 자격이 없음을 이해한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은 영이 특별히 사랑했던 애인과 암에 걸려 시들어가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교차시켜, 편파적인 신념과 고착화된 선입견으로 타인과 자기 자신을 망가트리는 현대인들의 잘못된 사랑을 집약한다. 슬픈 것은 파괴적이기 때문에 잘못된 사랑이라고 표현될 수밖에 없는 이 사랑에 대해서마저도 경계인인 우리 모두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만은 없고, 증오로 일관할 수 없으며, 따라서 잘못됐다는 수식어는 잘못된 표현일 수밖에 없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관계가 거대한 부조리극과 같다고 느끼면서도, 첨예한 모순 속에서도, 사랑은 벌어지고야 만다. 특히 우럭 한 접시를 곁들여 소주를 마시고 영과 애인이 나누는 키스는, 사랑은 우주를 빚는 것과 같지만 늘 달콤한 것이 될 수 없으며, 때로는 비릿한 우주의 맛이기도 하다는 것을 공감각적으로 느끼게 한다.  


<대도시의 사랑법>과 <늦은 우기의 바캉스>는 앞선 두 작품보다 더 연작소설적 성격이 짙다. 영은 수많은 남자들을 거쳐 사랑과 상실에 단련되고, 평생 옆에 있을 것 같았던 친구 재희마저도 시집보내며 서울이 주는 차가운 다정함마저 없으면 무너져버릴 것 같은 고독 안에서 다시 한번 사랑으로 구원받는다. 규호. 새해 첫날 아침에 풍등에 소원을 써서 날려 보내는 소소한 이벤트에 참가하면서, 영은 여러 가지 소원을 썼다가 모두 지워버리고 두 글자만을 남긴다. 규호. 그러나 그가 간절히 소원하는 규호를 품은 풍등은 멀리 날지 못하고 사선으로, 바다로 고꾸라지고 만다. 사랑은 다시 한번, 아름답고 달콤하지만은 않다. 특히 두 작품은 영이 카일리라고 명명하는 HIV 바이러스를 등장시켜, 영과 규호의 사랑의 깊이를 설명하면서도, 그들의 사랑이 부딪힐 수밖에 없는 한계는 여실하며, 그 한계는 관계 안에서 움트고 자란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침투하는 것임을 쓸쓸히 표현한다. 원래 고독한 존재인 사람은, 영은, 카일리에 발목 잡혀 사랑에 실패하고 다시 고독한 순간으로 침잠하게 되지만, 이 고독과 한계를 원망하기보다 자신 안에 내재하는 독립적 존재로 감수하는 길을 선택한다. 카일리 때문에 영이 밟고 있는 안 그래도 좁은 경계선이 더 좁아진다고 해서, 영은 자신이 Queer가 되기로 결정하고 그리하여 감수하겠다고 결심한 고통-그러나 그들이 퀴어라고 해서 이 고통이 당연한 것이 될 수는 없다-을 애써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영이 한계 안에 갇히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영은 작품 밖으로 걸어 나와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한다. 규호를 잊지 않는다. 태국의 게스트하우스, 실링팬 아래에서, 카일리에게 휴가를 주고 규호와 어떤 가로막음도 없이 온전히 체온을 나누며 했던 사랑을 기억한다. 영의 소원은 여전하다. 규호. 


메트로시티에 사는 것이 큰 메리트가 될 수 없는 역병의 시대를 지나고, 다양성이 북적거리던 한 거리를 메운 청춘들이 비참한 사고로 별이 되고 나서도, 대도시는 줄어들지 않는다. 여전히 서울은 네온사인으로 가득하다. 타인을 적당한 무관심으로 대하는 차가운 다정함이 별 한 점 보이지 않는 미세먼지 가득한 밤하늘에 넘실댄다. 아마 나는 저수지에 연꽃이 피고, 고여 있는 물 위로 날파리가 웅웅 대는 이 도시에, 영원히 살지는 못할 것 같다. 도토리묵 같이 묵직이 넘실대지만, 도도히 시간을 흐르고 있는 한강이 있는 도시로 돌아갈 것이다. 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을 읽으며, 서울의 매캐한 공기와 신호등이 영원히 켜져 있는 무딘 성실함, 점멸등을 켜지 않는 도심의 날 선 끈질김이 몹시 그리웠다. 우리는 다르고, 나는 다르고, 그래서 우리는 서로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다정한 지옥의, 차가운 다정함에. 대도시의 사랑법에. 이태원을 화려하게 비추는 간판과 그 아래 놓인 어두움에. 돌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나는 살기 위해 대도시로 돌아갈 것이다. 모든 사람은 혼자지만, 그러나 혼자만은 아니기 때문에. 혼자지만, 우리는 혼자만일 때도 완전해야 하기 때문에. 타인과 접촉하지 않거나, 가까이 접촉해야 하는 삶의 방식에 익숙해지지 못할 것이다. 퀴어의 숙명이다. 매혹적인 선택적 숙명을 앞두고, 숨을 고른다. 어느새 겨울냄새가 가득한 전주의 밤공기 사이로 별빛이 내린다. 그것이 네온사인인 것만 같아 무척이나 반갑다. 서울은 오늘도 다정하게 차가운 불빛을 온몸으로 뿜고 있을 것이다. 'Don't be a Drag. Just be a Queen.' 영과 규호가 처음 만난 클럽에 새겨진 문장들처럼. 사회가 정해 준 모습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내 고유한 인장을 지키기 위해. 이 도시의 모두가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그대로. 괜찮기 위해.





저는 이 글을 2022. 10. 28. 01:01분에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2023. 12. 04. 에 약간 손봤습니다. 2022년의 저는 이 글에 이런 추신을 덧붙였습니다.


대도시의 사랑에 대하여, 차갑고 다정한 위로를 건네는 어떤 도시에 대하여, 네온사인으로 당신의 삶을 응원하는 냉정한 도시의 표정에 대하여, 이태원에 대하여. 공교롭게도 가슴 아픈 사고가 일어나기 하루 전에 글의 초안을 써냈습니다. 퇴고하지 않고 올린 이 글이 그 초안입니다. 일단 이태원의 역사를 글에 녹이지 못한 것부터 시작해서, <단순한 진심>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는데 길어져 버린 분량, 타인의 프라이버시를 해칠 수 없어서 저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하지 못한다는 점, 박상영작가님 작품 특성상 작품의 결정적이고 세밀한 부분을 언급하기가 조심스럽다는 점까지. 마음에 들지 않은 구석이 무척 많은 글이라서 퇴고하지 않고 묵혔다 나중에 손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참사를 겪고, 애도를 하면서는 반드시 다시 쓰여야 할 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이 억울한 죽음들을 모욕하는 사람들의 입을 보며, 서울은 더 이상 다정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박상영 작가님의 <대도시의 사랑법>과 그 글을 읽고 쓴 이 부족한 리뷰 같은 글은 어쩌면 오래. 쓰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결국 괜찮아질 것이고, 이태원 또한 그렇게 되겠지만, 우리는, 서울은, 이태원은, 이 슬픈 사고가 발생하기 전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으니까요. 표면적으로 괜찮아 보이고, 전과 다름없이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여도, 우리가 4월의 어느 날을 잊지 못해 어쩐지 슬프게 봄을 보내는 것처럼, 이 계절의 이태원 또한 그렇게 남을 테니까요. 물론, 잊어서도 안 되겠고요. 그래서 이 글을 올렸습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평화롭던 시점의 서울과 이태원에 대한, 마지막 글을요. 영정 사진도 더없이 아름다웠던, 천국에 있을 J가 이 글을 읽고, 그래. 그래도 다정한 곳이지, 서울. 하고 생각해 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갈 수 없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각자의 자리에서 생에 몰두하는 느슨한 연대로, 우리의 서울을 되찾을 날이, 대도시의 사랑을 나눌 날이, 차가운 다정함으로 위로받을 날이, 끝내 있으리라 믿습니다. 깊이 애도합니다.


그리고 그때의 저처럼, 지금의 저 또한 이 글을 다시 쓰거나 이런 글을 다시 쓰는 것은 어렵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일상은 회복되었고, 이태원에는 조금씩 활력이 되돌아오고 있지만, 우리가 겪었던 악몽 같은 밤이 있기 전으로 결코 되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차가운 다정함을 공유(共有)하는 이웃들을 믿고 연대할 나날이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 또한 여전합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생을 사랑하기로 합시다. 오늘에 몰두하기로 합시다. 오늘을 삽시다. 자기(自己)를 완성하는 것은 자기 자신 뿐입니다.


이전 05화 존 밴빌의 <바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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