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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녘 연필소리 Dec 25. 2023

천명관의 <고래>, 인터내셔널 숏리스트 2023

꽃,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내가 14살 때에 세상에 온 우리 집 막둥이가 내년 1월 2일, 글을 쓰는 현시점에서 일주일 후면 군대에 간다. 작은 생명이 우렁차게 울고, 대소변을 가리고, 누나들이 많은 탓에 엄마 다음으로 인니! 하고 발음하고,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의 피부색을 놀림거리고 삼는 친구들을 혼내주더니, 어느덧 자라 수능을 보고, 대학교에 진학했다가, 이제는 군대에 간다. 장난하는 것을 좋아하고 까르르, 세상이 떠내려갈 듯 밝게 웃던 아이는, 이제 자기 방에 가만히 앉아 유튜브를 보고, 누나들이 달라붙으면 가만히 손을 잡아주다가 자리를 뜨는 청년이 됐다. 세월이 참으로 무상하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의 나는 세월이 무상하다 느낄 만큼 시간이 쌓이고 어른이 되면 다양한 사건 앞에서 조금 덜 울고, 조금 덜 마음 아픈 쪽으로, 무감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감정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인간에게 통제권을 넘겨주지 않는다. 요즘의 나는 막내를 볼 때마다 볼에 뽀뽀하려고 하고, 옆자리에 앉은 후배가 군대 얘기를 하면 코끝이 시큰하다 결국 조금 울기도 한다. 느끼고(感), 마음이 움직이는 것(情)이 논리를 따를 리 없지만, 주책맞다고 느낄 때마다 스스로에게도 놀란다. 때로는 스스로의 그런 모습에 실망할 때도 있고.



그래서일까. 날카롭고 세밀한 감성 표현이 담긴 작품을 좋아하고, 픽션의 특성상 논리나 개연성 보다 얼마나 감정적으로 공감을 얻을 수 있느냐가 좋은 이야기를 만드는 데에 더 중요한 착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너무 신랄하고 솔직하게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작품은 불편하다.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나 허구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 독해가 고통스러운 작품들이 있다. 문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불편한 골짜기랄까. 명백히 인간의 것이 아닌 이야기고 해학이지만, 인간 자체와 인간의 삶과 너무 닮아 있어서, 꺼내 들기 무서운 작품들이다. 감정의 진폭이 넓을수록 이런 작품에 허를 찔릴 가능성이 높다. 신나게 끔찍해하다가 다음 순간 끔찍함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같은 작품은 독해가 고통스러웠지만, 질곡의 역사와 그 역사를 닮아 긴 분량 때문이었지, 불편하지는 않았다. 반면 <백년의 고독>, <태풍의 계절>,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염소>, <향수> 같은 중남미 특유의 마술적 사실주의 작품이 그런 편이었다. 합리적이고 인과관계가 분명한 전통적 사실주의에서 벗어나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초현실을 마치 리얼리즘으로 풀어낸 작품들이다. 그리고 이 작품들보다 더 독자로서의 나를 불편하게 만든 작품이 천명관의 <고래>다. 대부분의 마술적 사실주의 작품들은 정치적 이유에서 은유를 위해 마술적 사실주의를 도입하고, 본작 역시 긴 시대를 다루고 있고 필연적으로 여러 시대의 시대정신, 특정 정치인, 세태 전반을 단편적으로나마 묘사 혹은 비평해야 하기 때문에 마술적 사실주의를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 작품의 말맛을 이해할 수 있는 독자이자, 본작이 그리고 있는 시대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구성원으로서, 독자가 본작에서 받을 수 있는 자극은 실로 엄청나다.



본작은 금복이라는 강인한 여성의 일생과 그녀의 딸 춘희를 축으로 전후의 혼란스러웠던 시대상과 수많은, 문자 그대로 셀 수 없이 많은 인간군상, 그만큼 다양한 이야기들을 마치 판소리 하듯이 엮어낸다. 본작이 여성을 다루는 방식이나, 성적 지향성, 장애 유무 때문에 타인을 차별하는 현상을 적나라하게 조명하는 방식을 불편하게 생각하면서도, 몰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순전히 작품에 고스란히 구어(口語)체로 녹아있는 말맛, 뛰어난 문장 조응력, 반복적으로 동일한 키워드를 제시하여 집중도를 높이는 방식 때문이다. 실제로 판소리는 <별주부전>, <심청전>, <장화, 홍련>처럼 과학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을,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있을법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경우가 많다. 인상적이게도 본작 역시 소설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판소리처럼 글보다 말, 묘사보다 연기, 구조를 갖춘 서사보다 이야기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측면에서 본질적으로는 현대에 만들어진 판소리에 가깝다. 내용에 따라 내용을 다루는 형식도 변화하여야 하고, 텍스트가 아무리 좋아도 그것을 전달하는 컨테이너가 부적합하다면 의미가 퇴색하기 때문에, 작가의 선택은 무척 영리하고 한편으로 당연하다. "성급한 독자여, 더 들어보시라."(p.161), "독자 여러분, 그를 영영 잊은 건 아니시겠지?"(p.180)와 같은 문장에서 무성영화 시대의 변사() 혹은 판소리의 광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관객은 본작이 완전히 허구이고 본작을 이루는 이야기들 중에 상당수는 과학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금복과 춘희의 자취를 따라가며 묘하게 마음 졸이게 된다. 아마 먼 옛날, 동짓날 아랫목에 앉은 손자에게 없던 살을 붙여 가며, 밤새 전설의 고향, 혹은 고향의 전설을 들려주던 할머니의 목소리를 종이로 옮긴다면 이런 이야기가 될 것이다. 물론 그 이야기는 도저히 웃을 수 없을 만큼 지독한 블랙 코미디는 아니겠지만.



본작의 주인공이 금복과 춘희 두 여성인 것처럼, 내용은 이미지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인 워딩으로 반복 제시된 두 가지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법칙과 고래. 첫 번째 키워드는 일일 열거하기도 어려운 많은 이야기들을 작가가 요약하는 방식인 '법칙'이다. 예컨대 금복이 첫 번째 남편인 생선장수와 살다가 더 젊은 남자를 원하고 결국에는 생선 장수보다 더 젊고 건강한 걱정과 함께 다음 살림을 차리게 되는 과정을 생식의 법칙으로 요약하는 식이다. 법칙은 작가가 제시한 이야기를 냉소적이고 지독한 농담조로 요약하는 역할도 수행하지만, 동시에 반드시 지켜(져)야하는 규칙이라는 뉘앙스로 말미암아 상식적이지 않거나 비도덕적인 선택 혹은 초현실적인 현상에 당위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예컨대 생식의 법칙은, 첫 번째 삶의 터전인 바다로 금복을 데려오고, 금복과 함께 살림을 꾸렸던 생선장수를 그녀가 배반하는 행위가, 금복에게 당연한 것이고 타인으로 하여금 이해받을만한 것이라는 착시를 유도하는 것이다. 법칙은 금복과 조응하며, 금복이 죽음을 거부하고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저지른 행동들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적극 활용된다. 평대에서의 화양연화 시절에 금복은 곧 평대를 이루는 온갖 법칙이 되고, 남자로 살기로 선택하면서 그녀의 위용은 사라지지만, 그는 자신이 세운 영화관에서 불 타 죽는 순간까지 그가 향유해 왔던 법칙에 기대어 자신의 영화(영화, 꽃 영 榮, 빛날 화 華 / 비칠 영 映, 그림 화 畫), 불멸을 꿈꾼다. 인간 실존의 본질은 인간의 존재적 유한성에 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동일한 결말을 가지고 태어나고 따라서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미력하며 무용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시간을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하여 노력하는 데에 사용하고, 자신의 정한 자신의 의미를 실현하기 위해서 삶을 살아내고자 노력하므로, 아름답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실존을 이룩하고, 자신의 본질적 자아를 발견하고 그와 화해에 이른다. 안타깝게도 죽음을 거부하고 다른 존재의 생명력에 집착함으로써, 금복은 자신이 이룬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스스로에게 대답하지 못한다.



두 번째로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고, 고래 그 자체, 걱정, 코끼리 점보, 극장, 개망초, 춘희로 이미지적으로 반복 제시되기도 하는 고래다. 금복과 달리 춘희는 말을 하지도 못하고 따라서 사회생활도 하지 못하여 반편이 취급을 당하지만, 감정적으로, 인지적으로 자연과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에 탁월하다. 그런 면에서 춘희는 걱정과 매우 닮아 있다. 작가는 걱정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서술해주지 않지만, 추측건대 걱정은 타인을 구하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위해서 눈물로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도 있는, 남다른 감수성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타인과의 상호작용, 사회생활, 경제생활,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는 삶 자체를 사랑하고 외부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순수한 존재였다. 춘희는 새아버지의 반듯한 가르침을 받고 걱정의 남다른 유전자를 물려받아, 엄마와는 달리 세속적인 가치에 무감각한 초월적 존재로 자란다. 금복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인간이 인간다움으로 아름다울 수 있고, 그가 살아내는 짧은 하루도 의미 있을 수 있는 이유가 다름 아닌 죽음에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거대하고 강인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고래를 영원한 생명으로 여기고 동경한다. 반면 춘희는 이미 세속적 가치에 무감각하기도 하지만, 금복이 자신의 생존만을 돌보느라 눈여겨보지 않았던 많은 죽음들을 대신 추모하고 애도하면서, 죽음의 의미와 삶의 중요성을 본능적으로 체감한다. 그녀는 자신의 친구였던 코끼리 점보의 죽음을 목전에서 목격하고, 금복이 마케팅을 위해 점보를 박제하자 고통받는 점보의 영혼을 위해 박제를 불태운다. 금복이 세운 고래 모양의 극장이 불타는 것을 목격한다. 그녀는 일생 내내 작고 여린 개망초가 척박한 곳에서도 뿌리내리고 어여쁘게 꽃을 피워 올리는 것을 목격한다-그러니까 금복이 멀리 고래에게서 찾았던 생명력은 발밑에 개망초에게도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금복이 그토록 동경했던 고래도, 그에 대응하는 개망초도, 죽고 시든다는 존재적 한계를 작품 내에서 여실히 드러낸다. 이는 인간 실존에 대한 거대한 은유다-. 자신이 죽자 한 많은 세계 너머로, 우주를 건너게 해 줄 인도자, 점보와 재회한다. 재소자 시절에 그녀가 같은 방 죄수에게 들었듯이,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녀는 아무도 오지 않는 벽돌 공장에서 혼자 벽돌을 반죽하고 빚고 밟고 구우며,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낸다. 그리고 그녀가 떠난 후에 한 건축가가, 죽음이라는 견고한 결말과 숨 막히는 상실에도 불구하고, 춘희가 살아낸 오늘들을 발견한다. 그렇게 늘 생(生) 내내 개망초이자 고래였던 그녀는, 타인에 의해서도 고래로 추인되고 추앙받는다.



인간은 인간과 매우 유사하지만 인간은 아닌 존재에게서 공포와 불편함을 느낀다. 불편한 골짜기가 여러 번 경험한다고 해서 익숙해질 리 없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본작은 불편하다. 내 안에 어딘가 살아 있는 금복이, 금복의 아빠가, 약장수가, 생선장수가, 이야기를 듣고 불쑥 고개를 들까 봐, 작품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내가 아는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릴까 봐,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천명관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어쩌랴. 죽음이 두렵다고 죽지 않기 위해서 살 수도, 죽음을 피해 다니는 것만을 목표로 살 수도, 오늘을 살아내지 않을 수도 없다. 끔찍한 이야기에서 내 얼굴을 발견할까 봐, 나도 모르게 느끼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에 모른 척 눈감고 살 수는 없다. 본작은 고약한 농담을 던진다. 당신이 금복이라면, 춘희라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대답하려고 하면 마이크는 다시 그의 손으로 넘어간다. 잠깐, 성급한 독자여, 더 들어보고 다음에 대답하시라. 그래서 진짜 대답할 수 있는, 진짜 내 차례가 올 때까지 잠자코 내 생을 살기로 한다. 벽돌을 굽고,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면서. 군대 가는 막냇동생에게 사랑한다고 한 번 더 이야기하고, 누군가가 또 군대 이야기를 하면 어쩔 수 없이 나는 눈물은 흘리기로 한다. 진폭이 크면 다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래처럼. 개망초처럼. 거침없이 날갯짓하고 세상으로 뛰어오르며, 두려움도 없이 바다 한가운데로 곤두박질치면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흔하디 흔한 모양의 꽃을 찬란히 피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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