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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녘 연필소리 Nov 06. 2023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 1997

작은 것들의 힘은 진정 작은가

설프로, 너무너무 미안한데. 나 대직 좀 부탁할 수 있을까. 대직은 별 문제가 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좀처럼 자리를 비우지 않는 사람이라 어떤 일 때문인지 궁금했다. 저 진짜 괜찮아요. 자주 가시는 것도 아닌데 뭘 그래요, 근데 무슨 일 있으세요? <기생충>이 개봉했던 2019년에 작품을 연거푸 3차례나 극장에서 관람했던 것을 떠올리면, 스스로가 가여워진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려서였나, 조금 더 용감했구나. 싶기도 하다. <기생충>은 그 수상경력이 증명하듯이 다양한 종류의 뛰어난 미덕을 갖춘 작품이지만, 분명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4년 전 그때의 나는, 영화가 무자비한 필치로 생생하게 고발하는 우리 사회의 그늘이 나와 무관하다는 감각 때문에, 예술성과 볼 때마다 새로이 보이는 영화로서의 특성에 초점을 두고 여러 차례 영화관을 찾지 않았던가 생각한다. 만약 <기생충>이 지금 개봉한다면 나는 예전처럼 편한 마음으로 여러 번 극장을 찾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간 내 삶은 그 전과 비슷하게 흘러왔고, 내 주변 또한 그러하며 그래서 나는 그대로지만 세상은 대부분 사소한 것들이 바꿔왔고, 우주는 평범한 사람들이 일궜으며, 역사는 보통의 일상 없이는 쓰일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달라졌다.


아, 그때 어렵나? 아니 아니요. 그냥 궁금해서요. 어디 좋은 데에 가세요? 에휴. 다른 것이 아니라 00이 때문에 해외 좀 다녀오려고. 00이는 선배의 어린 자녀였고 당시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혹시 어디가 안 좋은가요? 꼬치꼬치 캐물으려는 것이 아니라 걱정되어서요. 그러자 그는 손사래 치며 웃는다. 아니 우리 00이 xx(선배의 배우자)도 회사 좀처럼 못 비우잖아. 00이 낳고 세 가족이 한 번도 해외 가본 적이 없어서. 00이가 유치원에서 유일하게 해외여행을 안 가봤다나. 몇 안 되는 애들 중에 하나라나. 아무튼 애가 놀림받는다면서 울상으로 조르기에 가기로 했어. 그런 일이 진짜로 있다고요? 도시괴담 같은 것이 아니라? 그래, 자기 미스니까 잘 모르겠구나. 그러자 팀장님이 거든다. 요즘 애들이 차나 아파트로 서로의 처지를 비교하는 거 도시 괴담 아니다. 나도 철마다 애들 데리고 놀러 다녀. 비교당해서 기죽으면 안 되니까. 경험도 다 돈이라니까. 


도서 벽지에서 자란 유년시절에, 경험주의자였던 부모님 덕분에 가족과 전국 각지를 여행하고 여행지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추억으로 갈무리할 수 있었다.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고, 직접 경험을 많은 간접 경험으로 대체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렇지 못한 동네 친구들에 비해 나는 운이 좋았다. 그러나 서울로 유학을 떠나 만났던 교육환경이 월등하게 좋은 대학 친구들은 나보다 더 운이 좋았다. 여행지 중에서 어디가 제일 좋았는지 이야기하는 동기들 틈에서, 무적이 가득한 백령도와 석순이 영롱했던 환선굴의 기억은 여전히 빛났지만 어쩐지 내놓기 초라했다. 이를 악물고 과외로 돈을 벌고, 엄마 아빠 없이 짐을 쌌던 스물의 나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험도 다 돈이군요. 조심히 재미있게 다녀오세요. 여기 걱정은 마세요. 저 꽤 잘하니까요. 이왕 가시는 거 길게, 기똥차게 다녀오세요. 저는 00이가 행복한 게 더 좋아. 고마워. 세상에 나는 운이 덜 좋았다고, 혹은 좋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어린 마음이 하나라도 덜 어렸으면 좋겠다. 물기 어린 회상 사이로 고맙다는 말이 윤슬처럼 일렁였다. 설프로도 애 낳으면 알 거야. 정말 고마워.


21세기의 지구에 아직 카스트는 존재한다.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은 아직 <기생충>이 온 세상을 채우고 있었던 2020년 3월에 처음 만났다. 내가 사는 세상이 노력으로 인하여 공평해지고, 계급은 존재하지 않으며, 가난한 아이들도 미력한 경험으로나마 꿈꿀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낭만의 시절에. 그리고 그때에 썼던 글은 다음과 같다.




영겁은 찰나가 만든다. 자신의 시계 속에서 영겁을 이루고자 찰나를 견디는 영혼은 없다. 묵묵히 살아낸 순간들이 모여 영겁이 될 뿐이다. 오늘을, 찰나를, 살아내는 모든 영혼에게는 작은 것들이 중요하다. 여름날 그늘에 앉으면 들리는 나무의 태동,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지 3개월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잔디 위를 구르는 낙엽의 바스라짐, 강, 고자질, 꿈, 사랑, 금기된, 거짓말, 사고, 죽음, 쌍둥이, 어머니, 엄마, 위로, 건네서는 안 되는, 의지, 해서는 안 되는 방법의. 같은 것들. 작은 것들의 신은 신이 아니었던 것처럼 무참히 짓밟혀 사라진다. 작은 것들에 둘러싸인 채로 무책임하게.


아룬다티 로이는 첫 작품인 <작은 것들의 신>으로 부커상을 수상한다. 존밴빌의 <바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비롯한 부커 수상작품들의 일관적인 특징을 이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삽화가 있는 작품을 읽는 듯한 착각이 드는 뛰어나고 생생한 묘사(는 늘 현실성을 동반한다. 생생할수록 이야기는 현실적으로 다가오고 촉감도 다양해진다), 패러디, 언어유희(각주를 읽느라 바빠진다는 단점이 있지만), 메타포, 비유, 담담하고 시적인 문장, 그럴수록 통렬해지는 비판, 고발. 작가는 후일 자전적 성격이 강한 작품이나 현재 하고 있는 사회 운동들, 특히 여성인권운동과는 구분 지어 생각해 달라고 하였으나 이를 제외하고라도 인도와 영국의 관계, 인도 내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기독교 등 여러 종교가 혼재하면서 생기는 갈등, 공산주의, 진보주의, 카스트제도로 대표되는 인간 차별주의, 인간의 탐욕으로 인하여 오염된 채 고통받는 자연환경과 거꾸로 환경오염에 의하여 고통받는 인간의 모습 등, 인도가 직면해 왔고 여전히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갈등을 시적이면서도 유력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나아가 이 모든 갈등과 문제상황의 본질과 해결방법을 인간의 폭력적인 본성에서 찾고 있다.


차별. 차별주의, 나와 다른 존재, 다른 생각을 가진 존재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혐오. 다름에 대한 몰이해. 인도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카스트제도라는 인도 고유의 제도이자 편리한 표현방식에 기대긴 하였지만, 이야기 속에서 셀로판지를 대고 카스트를 지워내면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선을 긋고 계층화시키고, 다른 계층이라는 이유만으로 타인과의 관계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전 세계 모든 이가 가지고 있는 폭력성이. 모든 비극의 시작임을 깨달을 수 있다.


이런 지점에서 13년 전 인도에서 쓰인 이 작품이 작년 한국에서 제작되어 전 세계적 공감을 얻고 있는 <기생충>과 궤를 같이 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ㅡ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아무도 모른다. 스크린 너머로 망연했던 송강호의 눈빛을 기억하는가.

죽기에 어리지도, 많지도 않은 나이에, 파라반과, 작은 것들의 신과 사랑에 빠졌던 암무는 작은 골방에서 죽음을 맞았다.


ㅡ 그렇다고 멈출 것인가. 그저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다른 사람이 소중하게 바구니에 담은 작은 것들이, 나의 바구니에 담긴 작은 것들과 다르다고 해서 그 바구니를 부수거나 바구니를 뒤집어 쏟아버리지 말고. 설사 그것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저 함께 걸어가는 것. 바람이 불면 가끔은 함께 바람에 맞서는 것.


작은 것들이 스쳐 지나가는 찰나를 살아내며, 작은 것들의 신과 사랑을 나누며.




나는 여전히 작은 것들이 소중하고, 다름에 대한 몰이해와 악의 평범성이 결합하여 다양한 사회의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으며, 이것을 극복하는 것은 서로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특정 가치관을 폭력적으로 강요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카스트제도는 더 이상 인도의 것, 과거의 구습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서로 다른 이들을 뭉뚱그려 같은 범주로 지칭하고 구분 짓는 데에 사용되는, 여전히 살아 있는 관념이다. 현대 문명은 다양성을 몇 가지 기준으로 나누는 것만큼 게으르고 폭력적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이 전방위적 폭력행위를 합리화하고 방관하고 있다. <기생충>이 기우를 필두로 한가족이 계층 상위로의 상승을 위하여 언덕 위의 집을 향한 파렴치한 도전을 감행하고, 무참히 지하실 벽에 부딪혀 맹렬히 올랐던 언덕길보다 더 긴 터널과 많은 계단을 밟으며 하강하고도 비에 잠긴 반지하방으로 추락하는, 비에 젖은 옷이 축축이 내뿜는 냄새 때문에 더 큰 비극으로 침잠하는, 수직과 수평으로 스크린을 가르며 직접적이고도 신랄하게 계급 사회를 비판하는 이야기로 전 세계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았음에도. 4년 전과 오늘의 세계는 여전히 비슷하다. 시대는 나아가고 있으나 시절은 답보하는 흐름 속에서, 시대정신은 디플레이션을 겪고 있다.


며칠 전 이 글을 다시 쓰기로 마음먹고, 선배에게 오랜만에 메신저를 보냈다. 혹시 그때 그 이야기, 내 글에 써도 괜찮아요? 혹시 글 읽고 마음 상할까 봐. 가끔 시간이 나면 내 글을 읽는다는 선배는 웃음표시를 남발하며 괜찮다고 말한다. 그 왜, 흔하디 흔한 이야기고 누구나 겪는 일인데 뭐 특별하다고. 이름만 안 쓰면 됐지, 그거 누가 내 이야기인 줄 단박에 안다고. 별 걱정을 다한다. 힘겹게 마주 웃으며 현실은 조금 더 처연해졌다.  어디서나 생기는 흔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가슴이 그렁그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쓰여야 하는 것이 운명처럼. 쓰인다. 여전히 우리는 <기생충>이 스크린으로 옮긴 현실 속에 살고 있지만, 세상을 여태까지 앞으로 밀어온 것은 여전히 작은 것들의 신, 작은 것들의 힘이다. 작은 것은 여전히 작지만, 작은 것들은 진정 작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 영화 한 편으로, 이 미력한 글 한편으로, 세상은 뚝딱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쓰인 이 몇 줄의 글이 나를 바꾸는 것을 느낀다.


그때 하지 못했던 말들을 손끝에 담는다. 10여 년 전 아직 소녀였던 나에게, 먹고사는 일이 질긴 탓에 떠나지 못했고 그래서 놀림받았던 00이에게, 00이를 놀렸던 그의 친구들에게, 카스트의 좁은 틀 안에서 세상을 삼킬 듯이 쏟아지는 폭우 속으로 싹을 틔워 볼 엄두도 내지 못하는 어리고 작은 마음들에게, 그 어린 마음들 위로 쉴 새 없이 쏟아붓는 폭우에게,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나의 아이에게. 너의 추억은 있는 그대로 충분히 반짝이고 초라하지 않다고, 떠나지 못한 발은 부끄럽지 않다고, 다른 것을 틀리다고 말하는 것은 폭력이라고, 세상에 어떤 것도 당연한 것은 없다고, 겪고도 마음을 자라게 하지 못하는 경험은 하지 말자고,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르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낭만의 시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의 비극은 끝날 때까지 여전히 비극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은 것들의 신의 손으로 조금 더 나은 비극으로, 조금 덜 슬픈 비극으로, 평범한 이야기로, 해피엔딩으로, 다시 쓰일지도 모른다. 영겁은 찰나가 만든다. 작은 것들의 가치는 진정 작은가. 작은 것들의 힘으로, 감히. 오늘은 방금도 작은 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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