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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녘 연필소리 Jan 28. 2024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 1989

품위란 무엇인가

[남아 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 - 가즈오 이시구로] 품위란 무엇인가


우리 따송이는 커서 뭐 할 거야? 까르르 터지는 가족들 얼굴 사이로 아빠 얼굴만 홀로 심각했다. 세월은 쏜살처럼 빨랐고,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시간이 아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빠는 훈장을 받을 정도로 오랜 시간, 그리고 성공적인 방식으로 몸 담았던 공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몇 년간, 아빠 얼굴이 늘 먹구름이었던 것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 가족을 위해서라는 대의명분이 무색하게도 가족외식이나 여행보다 회식과 주말출근이 우선이었던 사람. 가족들은 그것을 못내 서운하고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또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먹고사는 일이란, 누군가의 인생을 책임지는 일이란, 지독하리만치 질기고 모진 일이다. 그 모진 일을 해내는 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였던 한 남자가, 자신의 존재가치를 입증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 시기를 맞은 것이다. 아빠에게는 무례하게 아빠를 놀리는 큰 딸을 나무랄 틈도 없었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에 복무하고 공직에 임용되었기에, 아빠에게는 직업적 사명이 없는 자신의 의미를 고민해 볼 여유가 없었다. 자존심 때문에 털어놓지 못하고 새까맣게 타들어간 마음의 내핵에 남아 있는 나날이 까마득했으리라 짐작한다.


자존심(스스로 자自, 높일 존尊, 마음 심心) 보다 자존감(자아존중감, 스스로 자自, 나 아我, 존중할 존尊, 무거울 중重, 감정感)이 훨씬 더 중요한 감정이고,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이 구린 것으로 평가받는 것이 현시류지만, 사실 자존심은 여전히 자존감만큼이나 중요하다. 남에게 굽히지 않고 스스로를 높임으로써 품위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삶에서 중요하지 않을 리 없다. 자존심이 세다는 사실을 오로지 굽히지 않음에만 초점을 두고, 고집 세고 오만한 태도라고 해석하는 것은 자존감에도 타격을 입힐만한 오도다. 사랑할 때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표현만큼 사랑에 대한 충실도를 잘 설명하는 말도 없다. 자신을 존재가치를 높이는 마음과 품위를 포기할 정도로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헤어질 결심>에서 해준이 직업적 품위를 내려놓고 붕괴를 선택하는 것을 바라보며 서래가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느꼈던 것은, 역으로 품위를 스스로 지키고자 하는 마음, 즉 자존심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설명한다. 그날들에 아빠의 자존심이 어땠을지 생각하면 죄책감이 든다. 돌아가서 놀리는 대신 토닥여 주고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시의 적절한 자극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빠의 퇴직기념식에서 아빠를 제외한 모든 가족은 세상을 잃은 듯 통곡했다. 공허할 그의 삶을 걱정하는 마음이 눈물의 공범들 사이에 들불처럼 번졌다. 일 년간의 공로연수, 그리고 퇴직 후 조용하고 유난히 길게 느껴졌던 쉼표. 아빠는 결국 재취업에 성공했다. 셋째가 전관예우 아니냐고 진지하게 물었다. 아빠처럼 공직을 걷고 있고, 인사와 청렴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내가 응, 아니야. 하고 대답했다. 아빠는 그제야 전관예우는 무슨! 아빠한테 쬐끄만 게 못하는 말이 없어! 윽박지르면서도 흐뭇한 듯 연신 껄껄 웃었다. 요컨대 그는 자존심을 회복했고 그로써 품위를 되찾았다. 그러나 아빠의 그 흐뭇한 얼굴에 안도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크게 불안했다. 아빠의 남아 있는 시간들이 아빠가 나이 때문에 쉬어야 한다는 이유로, 스스로로부터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될까 봐. 그것이 아빠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남을까 봐. 권위와 권한이 곧 그의 품격이고 품위였던 세월이 아빠에게 독이 될까 봐. 그래서 최선을 다했던 시간마저 퇴색될까 봐.


품위(물건, 등급, 품격, 질 품 品, 벼슬, 자리, 직위 위 位)란 무엇인가. 품계(品, 섬돌, 층계, 품계, 벼슬 차례 계 階)와 직위(직책, 직분, 벼슬 직 職, 位)를 아울러 칭하던 단어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인간이 갖추고 있는 기품과 위엄을 뜻하게 되었다. 기품과 위엄을 측정하는 객관적 지표가 없고, 따라서 기품과 위엄의 정도는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에 의존한다는 측면에서 오늘날 품위는 개인에게 갖는 의미가 제각각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품위는 여전히 <헤어질 결심>의 서래와 해준에게 있어서처럼 직업적 사명의식이나 프로페셔널함을 유지하는 측면을 의미하거나,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에서처럼 직업적인 측면에서 고상하고 격조 높은 형식과 성과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서래와 해준의 직업의식과 그들 간의 상호작용에 고상함과 세련미가 결여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작품이 그들의 정신적 불륜을 변호하거나 이해받을만한 것으로 추인해주지는 않는다. 물론 지켜보고 있는 관객 또한 미제에 부쳐서라도 사랑을 영원한 것으로 유지하려는 서래의 마음 자체는 안타깝게 지켜보면서도(물론 이는 그녀의 전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 그녀가 해준에게는 지켜야 할 신의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그에게 다가갔으며, 그녀의 의도는 아닐지라도 평생 무엇인가를 똑바로 쳐다보기 위해 노력해 왔던 해준이 중학생 아들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이는 해준과 정안 사이에 아들이 있다는 사실이 대사로 명시되지만, 한 번도 작품에 출연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된다)로 혼란에 빠진다는 점에서는 그녀의 행위를 정당하다고 평하지 못한다. <남아있는 나날>에서 연신 자신이 지닌 집사로서의 품위를 역설하는 스티븐스도 마찬가지다. 그가 끊임없이 합리화하고 그 결과를 책장 너머 독자들에게 전달함에도 불구하고, 작품과 독자 또한 그의 직업관을 존중하면서도 그의 품위에 대해서는 냉정한 평가를 남길 수밖에 없다. 집사라면 응당 주인의 업무와 업적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충성해야 하는가. 설사 주인이 나치에 협력하고 유대인을 핍박하며, 결과적으로 세계평화의 퇴보와 악의 평범성의 전파에 일조하였더라도. 그가 악의를 가지고 한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믿는 것만으로도 집사가 달링턴을 방임, 방조, 믿음, 존경, 나아가 추앙하는 것이 합리화될 수 있는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은 품위 있는 집사로서의 자부심을 가진 한 노인이, 처음으로 업무에서 해방되어 여행(물론 이마저도 온전한 여가의 의미는 아니지만)을 떠나 생긴 일들과 그로 인해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부커상 수상작다운 세밀한 심리묘사가 돋보이지만 수상작에서 공통으로 느낄만한 또렷한 색채감은 본작이 여행기의 형식을 빌리고 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상당히 배제되어 있다. 영국인 신사 달링턴 경을 모시다가 미국인 패러데이를 모시게 된 스티븐스는 패러데이의 권유로 패러데이의 자동차 포드를 타고, 예정에 달링턴 홀에서 함께 일했던 켄턴 양을 달링턴 홀로 다시 스카우트하기 위해 여정을 떠난다. 그는 처음으로 직접 운전하여 여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양한 문제를 겪게 되고, 길 위에서 만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 또 다양한 장소에서 숙박하면서 전에 없던 새로운 경험들을 하게 된다. 그는 이 짧은 여행기를 시간의 순서대로, 그리고 여행 때문에 회고하게 된 자신의 삶은 에피소드 중심으로 기록한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가즈오 이시구로가 최근작 <클라라와 태양>에서 보여주었듯이, 비교적 초기작인 본작에서도 인물의 의식적 흐름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치밀하게 짜인 반전이 서서히 베일을 벗게 되는 구조를 채택한다는 것이다. 잔잔한 에피소드가 겹겹이 쌓임에 따라 평범한 집사라고 생각했던 스티븐스에 대한 인상이 점차 달라지며, 상기했던 바 대단하다고 평할만한 에피소드가 부재한 상태에서도 차근차근 인물에 대한 평가 판도를 뒤집어버리는 방식이 매우 인상적이다.


스티븐스는 현대인인 독자에게 생소한 ‘집사’의 정의에 대한 권위자로 역할하고, 풍부한 경험을 토대로 위대한 집사란 무엇이고, 훌륭한 집사가 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품위는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적절한 예를 들어 공들여 설명한다. 그리고 겸손한 방식으로 자신 또한 품위 있는 집사의 반열에 오른 사람임을 역설(力設)한다. 집사의 세계에 무지한 독자는 집착과 반복적인 혼잣말에 가까운 이 강력한 주장을 수상하게 생각하면서도 그의 설명을 받아들이며 그가 훌륭한 집사라는 주장에 공감하게 되고, 그의 중심에서 해석된 역사를 별 다른 반발 없이 수용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지지하고 예찬하는 달링턴 경의 업적에 대하여, 점층적인 불편함 내지는 불쾌함을, 마치 젯소 작업을 하듯이 아주 얇게 쌓아 올려 가게 된다. 스티븐스는 달링턴의 불쾌한 혹은 불편한 행위를, 달링턴이 늙어서 판단력이 흐려졌기 때문에 혹은 누군가와 대의 때문에 맺게 된 묵시적 합의 때문에 내린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어서, 요컨대 실수라고 축약한다. 독자의 불편함은 달링턴이 달링턴 홀에서 자기 몫을 제대로 해내고 있는 유대인들을 해고하기로 결정하는 데에서 시작하고, 세계 대전 이후 팽배해져 있는 반독 정서를 완화하고자 동분서주하는데에서 가속하다가, 그가 영국 총리와 히틀러를 만나게 하기 위해 오랜 시간 로비하고 달링턴홀을 그 작전의 전초기지로 삼아 전투적으로 임했음이 드러나는 데에서 극에 달한다. 그리고 스티븐스가 달링턴을 한결 같이 옹호함에 따라, 그의 품위에 대한 의심도 달링턴에 대한 불편함에 비례한다. 또 스티븐스 개인사적으로는 아버지가 위독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알면서도 반독 정서를 평화적으로 해소하겠다는 명목으로 달링턴홀에서 주재한 행사 때문에 자의적으로 임종을 지키지 않았던 것으로, 그의 인간으로서의 품위에 금이 가는 것이 본격화된다. 스티븐스는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거나, 자신이 그런 대단한 일을 제대로 판단할 정도로 수준 높은 지식과 판단체계를 갖추지 못했으며, 인류의 역사에 큰 역할을 했던 행사에 자신이 꼭 필요한 요소였다는 핑계로 일관하지만, 독자는 스티븐스에게 교육 수준이 낮은 유럽인이라도 전쟁을 겪었다거나 극악무도한 차별을 목도한 자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시민의식과 문제의식이 부재하고, 그에게서 얕은 관계를 맺은 사람이라도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보여야 하는 적정한 추도의 자세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그에게 크게 실망하고 그의 인간성에 의심을 품게 된다.


한나 아렌트가 주장하였듯이, 악의 얼굴은 대부분 보통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악은 평범하고 따라서 평범한 얼굴들 사이에서 눈에 띄지 못한다. 악은 심리상태가 취약하거나 사고가 게으른 자들에게 손쉽게 침투하여 깊게 뿌리내리고 빠르게 주변을 장악한다. 악은 유형력을 행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거짓으로 사실을 꾸며내거나 진실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꾸며낸 사실을 가십으로 소모하는 부당행위로도 유형화한다.  스티븐스는 어리다는 이유로 달링턴의 대자(대신할 대 代, 아들 자 子/ 대자는 한국어로 여러 의미를 지닌다. 카디널이 달링턴의 대자인 것은 가톨릭에서 달링턴이 카디널의 대부, 즉 후견인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카디널은 달링턴의 피후견인이다. 헤겔은 즉자, 대자, 즉자대자로 변증법을 전개하고, 한 존재자가 의식적으로 자신 안에 간직하고 또 관계를 맺는 대상적 존재를 가리켜 대자라고 하였다. 장 폴 사르트르가 이를 빌려와 사물을 즉자존재, 의식을 대자존재로 부르고,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을 대자라고 정의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카디널이 달링턴의 대자라는 점이 꽤 의미심장하다. godson, fur sich 모두 대자로 한국어 번역 되기 때문에 생긴 일이기 때문에 생긴 공교로운 일이다. 꿈보다 해석이지만 스티븐스가 달링턴과 자신을 동일시할 때가 있고, 달링턴의 대자인 카디널은 달링턴에게 의존하면서도 달링턴의 행위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스티븐스 역시 달링턴을 추앙하면서도 달링턴의 행위에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있는 것으로 묘사되므로, 세 인물의 관계가 대자라는 단어 선택으로 인하여 묘하게 읽히는 착점이 있다. 번역서를 읽을 때마다 원서로 읽지 못할 때의 아쉬움이 남지만, 동음이의어 때문에 생기는 이런 재미를 발견할 때는 아쉬움이 상쇄되고 한국어로 읽는 재미가 배가 되기도 한다.)인 카디널이 달링턴홀에 올 때마다 상대적으로 그를 캐주얼한 방식으로 대하고, 심지어 달링턴의 부탁을 받아 남녀 관계에 대하여 설명해주려고 하기도 한다. 자연의 섭리와 동물들의 번식 행위를 예로 들어 이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하자, 카디널은 자신도 그에 대해 잘 안다고 반박한다. 스티븐스는 이를 믿지 못하고 다시 카디널에게 자연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하지만, 결국 달링턴이 지시한 남녀관계에 대하여 카디널에게 설명하는 일을 간접적인 전달로나마 수행하는 데에 실패한다. 이는 스티븐스가 사명의식을 가진 책임감 있는 집사였지만, 인간으로서나 남자로서의 삶에는 충실하지 못했고 동시에 서툴렀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암시는, 스티븐스로 인해 어리숙하고 수동적인 것으로 묘사되었던 카디널이 스티븐스에게 달링턴이 히틀러가 영국 총리에게 방문하는 일을 주선하여 왔음을 알려주며 그의 무관심을 꼬집었던 일례가 이 회고를 통해 드러남으로써,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카디널이 아니라 스티븐스였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본작은 차별이나 폭력으로 실행되는 악의만이 악이 아니라, 눈을 똑바로 뜨지 못하고 현실을 아전인수하며 외면하는 무관심과 선의라고 무관심을 포장하는 부작위 또한 악의 현화임을 고발하고 있다.


스티븐스는 자신이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에게 자신이 달링턴 홀의 집사였음을 무의식적으로 숨긴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로 인하여 자신이 달링턴의 행위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음을 인지하지만, 끝내 그것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자신을 저명한 인사로 오인하고 환대해 주는 어느 시골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이 달링턴 혹은 달링턴 홀에 모였던 권위자 중 한 명이었던 것처럼 행세한다. 이는 그가 카디널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반성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신이 무지 뒤에 비겁하게 숨어 위대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과거 주인의 업적 속에서 살아왔음을 반증한다. 물론 다음날 그는, 그의 정체를 눈치챈 박사에게 자신이 집사임과 모두를 실망시키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므로 밝히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사과하며, 나(독자라면 누구나라고 일축하기는 어렵다. 용기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자신을 저명한 실력자라고 오해하는 상황에서도 사실을 밝혔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 상황에서는 솔직하기 어려웠을 것임에 공감한다. 그러나 악의는 평범한 사람에게 부지불식간에 깃들고, 그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첨언을 했다는 점에서 그가 달링턴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여전히 그의 품위보다 실력적 측면에 무조건적으로 스스로를 부속시키고 있었음과 그에 어떤 저항감도 없었음이 드러난다. 패러데이가 달링턴 홀을 매수할 때, 자신도 달링턴 홀의 부속품처럼 일괄 매매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표현하는 점에서도 그가 스스로의 의미를 깎아내리고, 성찰 없이 거대 자본과 강력한 실력에 자신을 의도적으로 포함시키고 했음이 여실히 표현된다.


결정적으로 그는 켄턴 양과의 대화를 통해, 그녀가 자신을 사랑했고 직업적 품위를 동경하였지만, 역사 속의 일원으로서의 그에게는 실망하였고 인간으로서의 그의 품격을 의심하였으며, 이제는 자신의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고 남은 인생은 그와 함께할 생각을 확고하게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 못한, 혹은 가지 않았던 길에 대하여 생각하며 착잡해한다. 여행 마지막 날. 그는 켄턴 양을 스카우트하겠다는 인생 첫 여행의 주목적을 이루지 못한 상태로, 저녁이 내리는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기 위해 벤치에 홀로 자리 잡는다. 그는 옆자리에 앉은 다른 노인이 사람들이 하루 중 저녁을 제일 좋아하고, 인생을 하루에 비교하자면 노년은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저녁과도 같다고 이야기했던 것을 곱씹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해준처럼 고개를 들어 자신의 눈을 씻고 자신이 발 디딘 땅과 자신이 살아내고자 하는 의미를 사유할 기회를 모른척하고 만다. 그는 외로운 자신과 행복한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이 집사로서 부족한 부분은 유머감각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 그 부분을 어떻게 극복해 낼지 생각하며 여행기를 마친다.


본작은 The Remains of The day, 그러니까 하루 중에 남은 부분, 하루를 인생으로 비교한다면 인생에 남아있는 나날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하루가 다 지나갔더라도 아직 끝나지 않은 이상 남은 나날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하여 심도 있는 질문을 던진다. 품위의 유무와 그 높낮이는 인간마다 판단기준이 다른 것이지만, 우리가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품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묻는다. 남아 있는 나날을 인간으로서 품위 있게 살아내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는, 형식적으로나 심미적으로 인간이 타인에게서 어떤 평가를 받는가와 전적으로 무관하다. 스티븐스는 위대하고 세련된 집사일지는 몰라도 차별의 역사에서 무고한 인간이 될 수는 없다. 달링턴이 대단한 거사를 기획하고 실현한 유망 정치인이었을 수는 있지만, 전쟁의 역사에서 선의로 행동한 자로 남을 수는 없다. 치열한 자기 고민과 성찰 없이는 고결한 인간의 존재는 성립할 수 없다. 유럽을 움직일 만큼 거대한 자본력을 갖추고, 각 분야의 권위자들을 한 군데에 모을 만큼 큰 유형력을 가지고 있는 자라고 해서, 그가 하는 행위가 모두 옳거나 그의 실력행사가 모두 합당한 것이 될 수는 없다. 교육받지 못하고, 충실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낸 자라고 해서 높은 직업적 품위가 인간적 품위로 치환될 수는 없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아이히만은 성실하고 충실한 독일의 공무원이었다. 박종철 열사를 고문한 악마들과 이한열 열사에게 최루탄을 수평 발포한 악인들은, 명령을 충실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경찰이고 전경이었다.  <1987>에서 연희는 울부짖는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 눈을 뜨고, 의심하고, 불온한 것에 반대하고, 고민하고, 연구하고, 타인의 목소리를 듣고, 그리하여 결정한 옳다고 믿는 것을 실천한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부당한 명령에 저항하는 양심이 늘 존중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마저도 없으면 세계의 품위는 퇴보한다. 시대정신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도. 바위는 죽어있지만, 계란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아빠는 새로운 직장에 낙하산으로 취임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물론 비난하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지만, 아빠는 더 열심히 일했다. 성실하게 출장을 가고, 야근을 하면서 기획안을 내놓고, 주말을 반납하고 출근을 했다. 그러나 오해는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 진실이 아닌 언사가 진실처럼 소모되었다. 아니, 재취업 노래를 부를 때는 언제고. 출근하기 싫다고 아침마다 타령을 하지를 않나, 니기 아빠 이상하다 요즘. 수화기 너머 엄마의 목소리에서 불온을 감지한 아내의 가느다란 걱정이 묻어 나왔다. 아빠의 취임을 거세게 반대했던 직원은, 공휴일에 자기 대신 출근해서 일하고 있는 60대 노인을 폭행했다. 아빠의 직업인으로서의 품위와 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은 그가 아빠에게 던진 화분의 포물선을 따라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아직도 아빠가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했던 그날의 아침을 생각하면 심장이 발밑까지 떨어져 대롱거리는 것만 같다. 툭하고 건드리면 실낱 같은 핏줄이 뚜둑 뜯어져 심장이 거친 바닥에 찢길 것만 같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아빠는 남아 있는 나날을 함께할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더 이상 직업적 품위에 의존하지 않기로 했다. 여전히 아빠는 멀리 출장을 가고, 밤마다 컴퓨터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면서도 기획안을 수정하고, 몇 안 되는 직원들에게 자신이 노인이라는 이유로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형식적으로도 세련된 직업인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한창때처럼 멋들어지게 양복을 차려입고, 향수를 칙칙 뿌리고, 명품 벨트와 신발을 반지르르하게 갖추고 출근을 한다.


그러면서도 직장 밖에서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품위를 갖추기 위해 따로 시간을 할애하기 시작했다. 돋보기가 쓰기 싫어서 멀리했던 독서를 다시 시작하고, 신문을 읽는다. 다시 꿈이 필요해졌을 때를 대비해서 블로그를 열었고,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 그는 60대 중반이고, 디지털 노마드가 되고 싶다고 하얗게 웃으면서 말한다. 시간을 들여 엄마와 폭넓게 대화하려고 노력하고, 딸들이 집에 가면 업무와 승진에 혈안이 되어 있던 시절에 훗날로 미루었던 아빠로서의 오랜 부채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나서서 가족 여행을 계획하기도 한다. 지역 사회 밖에서 벌어지는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려고 애쓴다. 품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뀌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인간이라면 응당 해야 할 사고를 하는 것과 그 사고를 마땅히 행동으로 옮기겠다고 마음먹는 것과 의도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다. 스티븐스의 부친이 집사로서의 존재 가치의 추락을 받아들이고 일선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기꺼이 도맡고, 뒤늦게나마 스티븐스와의 관계 회복에 예전과는 다른 태도로 임했던 모습을 떠올린다. 아빠는 스티븐스의 부친과 매우 닮아 있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에게 약속한다. 직업인으로서 그리고 한 업무를 성공적으로 해내는 프로로서의 품위도 중요하지만, 한 사람의 딸로서, 무엇보다도 인간으로서의 품위에 대해서 잊지 않고 늘 갈고닦겠다고.


아빠가 크게 다친 그 사건 이후로 더 자주 본가에 가려고 노력하면서 관찰해 온 바, 아빠는 아마도 남아 있는 저녁을 어떻게 살 것인지 결정한 것 같다. 오후 네시에 선 그 뒷모습을 아침 여덟 시에 선 내가 말끄러미 바라본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품위란 무엇인가. 내 품위는 어떤 모양인가. 저녁쯤에는 대답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스티븐스처럼 엉뚱한 답에 도달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보는 수밖에. 내가 살아 있는 계란이라고 믿는 것. 바위를 내려치는 계란이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  포드에 올라 미지의 땅으로 여섯 날을 운전하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나의 오늘을 묻는 것. 당연하다는 듯이 오늘을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는 것. 나는 누구인가, 어떤 의미가 되고 싶은가. 남아 있는 나날, 하루 중 남아 있는 시간을 어떻게 살 것인가. 대답은 그 질문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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