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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녘 연필소리 Jan 21. 2024

데이먼 갤것의 <약속>, 2021

J에게

[약속 - 데이먼 갤것] J에게


대부분의 비극은 사회의 고질적인 구조적 병폐가 개인의 삶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 비극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일부에게만 찾아온다는 점에서, 무작위성은 비극의 본질이 되고, 비극으로 하여금 사고(일 사 事, 까닭 고 故)와 같은 발생 논리를 띄게 한다. 비극이 문득 찾아오는 사고와도 같다는 관점은 평범하게 삶을 영위하는 이들에게 일상적 공포로 기인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이유로 사회에 연동되어 있어 행동과 사고의 반경에 제한을 겪을 뿐만 아니라, 타인이 사회에 미친 부정적 영향의 대가를 사고처럼 대신 치르고, 사고처럼 찾아온 비극을 대신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침잠의 순간. 이 일련의 과정으로 인하여 비극은 더 비극적인 것이 되고 슬픔은 극대화된다.


몇 주 전에 막냇동생 J가 훈련소에 입소했다. 안으면 깨어질 것 같고 깨물면 입안에서 녹아버릴 것 같았던 아기는 자라, 자기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자신의 정의를 공표할 줄 아는 소년이 되었고, 담담한 얼굴로 분단국가의 비극을 개인이 감내해야 하는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청년이 되었다. 입소 준비물을 지퍼백에 포장하고, 지퍼백 겉면에 네임펜으로 내용물을 적으면서. 막둥이가 자라는 것을 지켜보았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울컥거리는 목멤을 몇 번이나 눌러야 했다. 동생은 뭐랄까, 다름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아이였다. 생계를 농업에 기대는 작은 산간 지역 특성상, 혼인 적령기를 놓친 남성들은 낮은 혼인 성사율과 출생률의 해소 방안을 국제결혼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이미 막둥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친구들 중에 다문화 가정 출신의 아이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어른들의 폭력적 언행은 전염력이 심해서 아이들은 쉬이 전염되었고, 천진난만한 얼굴들 사이에서 소수에 해당하는 천진난만함은 다르다는 이유로 가해지는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 막둥이는 그런 다름들에게 출신과 상관없이 가장 친한 친구를 자처하는 유형의 친구였다. J는 그런 거 안창피해? 엄마가 다른 나라 사람인 애들이랑 사진 찍고 같이 놀러 다니는 것. 그럼 친구들이 놀리지 않아? J는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되물었다. 그게 왜 부끄러워? 그냥 다 같은 친구들일 뿐이야. 날 놀리는 사람이 나쁜 거야. 그날 나는 너무 창피했다. 부끄러웠다. 맞아. 혹시 J까지 괴롭힘 당할까 봐 그랬어. 괴롭히면 힘들겠지만 그건 나쁜 거잖아. 나는 아직도 그날의 어린 J의 눈을 생각하면, 치미는 울음 속에서 무기력하게 길을 잃는다. 다른 것은 인정받거나 이해받는 과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채로 그저 존재할 뿐이라는 나의 믿음은 그때 시작되었다.


아직도 우리 집에는 J가 유치원에 다니던 때에 그가 다른 그대로도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했던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이 걸려있다. 그 사진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일상적 정의 구현의 이미지, 즉 구조적 부조리가 개인의 비극으로 구체화하고, 공동체의 느슨한 연대가 그것에 저항하는 모습을 대표한다. 어른들이 남들과 다른 삶, 그러니까 혼자 늙어가는 삶을 감당하기 싫다는 이유로 대가를 지불하고 타국의 여성과 이행한 결합은, 다수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태어난 소수의 아이들의 비극이 되었다. 그리고 그 비극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소수의 아이들이 차별의 일반화와 만연화 저지를 위하여 최전선에 섰다. 인간으로서 보장이 당연한 것을 보장하고 보장받기 위하여 결연해져야 하는 살풍경은 침입자들이 원주민을 대상으로 심리적, 물리적인 젠트리피케이션 정책을 가했던 시대상을 그린 <플라워 킬링 문>, <밤의 경비원>, 유색인종 차별에 대한 저항의 역사를 그린 <포레스트 검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잔인한 차별 정책과 그 속에서 말없이 병들어야 했고 폭력적 침범과 지배에 노출된 흑인(원주민) 피해자들 뿐만 아니라, 차별정책의 가해자 측에 소속되어 있었던 일반 백인 시민들에게도 깊게 남은 상흔을 조명한 데이먼 갤것의 <약속>을 읽으면서 그 옛날 J의 눈과 차별이 만연한 환경에서 천진난만함을 잃어가야 했던 J의 친구들을 상기했다.


갤것의 <약속>은 아파르트헤이트가 정책적으로 자리 잡았던 시절부터 만델라가 대통령을 역임하며 차별정책이 해소되었던 시점을 거쳐, 그러나 사회적 합의와 충분한 교육, 체계적인 시스템이 부재한 상태로 평등한 자유주의 사회로의 이행하는 과정에서 부패, 빈부격차, 역차별, 폭력사태, 알코올과 마약의 성행 및 문제 심화 등 다양한 형태의 부작용이 남아공 사회를 붕괴시키기까지의 긴 세월을 조망한다. 그리고 이런 구조적 변화가 한 가정의 비극으로, 죽음의 원인으로 기능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이는 사회적 병폐가 개인의 삶에 사고처럼 침투하여 비극으로 결론 맺어지고, 미약하지만 끊임없는 저항에도 불구하고 문제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은 해결되지 못한다는 결과로 이어지는 비극의 적나라한 단면이다. 본작은 주인공으로 처음부터 비극의 중심에 서 있었으나, 자신의 상처를 돌보기보다 차별받는 소수의 편에 서서 당연히 이행되어야 하는 것에 약속이라는 이름을 붙여서라도 끝까지 이행시키는 강인한 여성 아모르를 채택한다. 아모르는 어린 시절 마당에서 번개를 맞고, 가족들의 보살핌으로 목숨은 건지지만 그 사고로 발가락 한 개를 잃는다. 벼락을 맞는다는 강력한 사고는 그녀의 가족사에 생길 오랜 비극의 예고이자 축소판이고, 그녀가 감내해야 할 차별적 드라마의 시놉시스가 된다. 그녀는 어린 시절 몸매가 뚱뚱할 때는 그 남다름 때문에 차별받는다. 그러다 어머니 사후 9년째, 아버지의 장례식에는 날씬해진 몸과 아름다워진 용모로 참석한다. 어머니의 죽음 자체와 어머니가 죽기 전에 유언으로 남기고 아버지가 이행을 약속했던, 흑인 하녀 살로메에게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의 소유권을 이양한다는 약속이 무참히 무시되는 상황이 주는 충격 속에서 비쩍 말라간 결과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비극을 감내한다는 고통 때문에 그녀의 외적 아름다움은 정점을 기록한다. 그리고 각종 시기와 질투, 부러움, 탐욕의 대상화. 그녀는 다르다는 이유로 다시 한번 차별을 겪는다.


아버지가 자신이 운영하는 파충류 동물원에서 독사에 물려 죽고, 언니가 강도를 만나 무참히 살해당하고, 오빠가 자신의 나태함과 무가치함을 인지하고 자살하는, 일련의 비극적 사고의 발생과 죽음. 레즈비언이자 에이즈 환자들의 병동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라는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영역에서도 계속되는 선입견(먼저 선 先, 들 입 入, 볼 견 見)에 입각한 차별적 대우. 그녀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며, 약속이 이행되지 않는 상황을 견디지 못해 도망치기도 하지만, 자신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에도 어머니가 이 땅에 마지막으로 남긴 빚을 청산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한다. 장례식 때마다 집에 와서 살로메의 손을 마주 잡고 미안함을 전하고, 자신의 무력함을 탓하며, 아버지, 언니 아스트리드, 오빠 안톤에게로 실권이 이양됨에 따라 실권자가 죽으면 그다음 실권자에게 약속을 이행할 것을 요구한다. 맺을 약 約, 묶을 속 束. 침입자가 원래 땅의 주인에게 땅을 돌려준다는 당연한 일을 약속해야 하는 시절이었고, 말로써 맺고 묶은 것이 지켜지기보다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은 시절이었다. 아모르는 당연히 이뤄져야 하는 것을 약속하기까지 했기에, 약속이 이행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그 이행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되찾고 죽은 어머니를 제외하고, 기독교인으로 남았던 아버지, 언니, 오빠가 보속(도울 보 補, 속죄할 속 贖) 하지 못하고 각자 다른 형태의 죄를 안은 상태로 죽는 것은 약속의 불이행이 용서받지 못할 죄에 비견할 만한 것임을 은유한다. 그들이 약속을 충분히 이행할 수 있는 상태에 있었고, 살로메의 집은 경제적으로 무가치했으므로 약속이 이행이 실질적으로 그들에게 줄 타격은 전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이행하고 싶지 않아서’ 이행하지 않았으므로, 인간으로서 이행이 당연한 것의 불이행은 용서받지 못할 죄가 되는 것이다. 실권자가 된 아모르는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반드시 이행될 것을 규약화한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자, 긴 세월 동안 자신을 속박했던 오랜 의무감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유로운 몸이 되어 속옷만 입은 상태로 지붕 위에 앉아, 한 많은 농장을 내려다본다. 그녀의 이름이 Amor, 사랑의 신의 이름을 따 사랑을 의미하게 된 라틴어에서 유래한다는 점에서, 그녀가 지붕에 앉아 있는 이미지는 Amor vincit omnia, 사랑은 모든 것을 극복한다는 라틴어 어구와 일맥상통한다. 본작은 구조적으로도 각 장의 이름(주인공)을 죽음을 맞이하는 자로 설정하여, 아모르가 일련의 죄악을 낱낱이 지켜본 목격자이자, 마지막 순간까지 살로메에게 사과하는 살아 있는 양심이자,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고 있는 힘껏 고발하는 고발자이자, 최후까지 살아남는 유일한 생존자가 되게 한다. 아모르는 한순간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지만, 비극의 단초였고, 보속 하지 못한 이들의 죄를 목격한 유일한 증인이었으며, 구조와 공동체가 저지른 카인의 원죄를 대신 속죄하는 느슨한 연대의 일원이었다. 다름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넓은 품에 안아주는 것으로 삶을 계속되게 하는 것, 카인의 놋땅에서도 화해(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 종말을 기념하기 위하여 화해의 날을 제정했다)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던 것이다.


본작은 부커상을 수상한 다른 작품들처럼 대비감이 뚜렷한 색채묘사가 두드러지지 않고,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소재 특성을 반영한 흑과 백의 색채감을 대조적으로 묘사하지도 않지만, 핸드헬드로 촬영한 영화 혹은 변사가 있던 시절의 시나리오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극적 연출과 묘사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이는 아모르가 겪었던 벼락 사건이 이후에 이어질 이야기들의 시놉시스 역할을 한다는 감상과도 연관이 있다. 예컨대 A의 입장과 심리를 전지적 작가적 시점 혹은 A의 1인칭 시점에서 설명하다가, A와 B가 대화를 나누거나 서로를 지나치면 카메라가 B에게 옮겨 붙어 B의 입장과 관점을 설명하는 식으로 시점 쇼트가 넘어가는 듯한 느낌을 맛볼 수 있는 것이 그러하다. 독자를 당신이라고 부르거나, 독자의 생각을 묻거나, ‘자, 보라’라고 말을 건네는 방식은 다큐멘터리나 영화의 주인공이 내레이션이나 카메라를 응시하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말을 거는 방식과 유사하다. 전지적 작가 시점이 작품과 독자 간의 상호 작용에 직접 개입하는 이런 방식은 최동훈 감독의 <타짜>,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프렌치 디스패치>와 같은 작품들을 연상하게 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영상매체가 집중도와 분량의 문제로 수많은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지 못하는 데에 반해 본작은 장의사, 스쳐 지나가는 노숙자, 아스트리드를 살해한 범죄자, 안톤에게 뇌물을 받고 음주 운전을 눈 감아 준 경찰, 아모르네 가족의 일을 담당해 온 변호사 등, 주요 인물과 스쳐 지나가거나 대화를 나눈 모든 인물들을 스케치하고 있으며, 영화에서는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을 이 인물들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상징적으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나아가 실권자의 죽음으로 인해 조금씩 시점 쇼트가 넘어가는 횟수와 등장인물(카메오 혹은 엑스트라)이 점점 줄어들고, 마침내 안톤의 죽음으로 인하여 아모르가 실권을 장악한 순간에는 카메라가 어지럽게 옮겨 다니지 않고 아모르에게 집중한다는 점은, 본작이 치밀하게 설계된 작품임을 증명한다. 독자는 비로소 주의가 어지럽혀지지 않는 상태에서 아모르, 사랑에 밀도 높은 집중을 하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본작은 부커상 수상작 특유의 탁월한 묘사력이라는 공통적인 특징에 있어서도 더할 나위 없이 부합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6퍼센트의 주로 네덜란드계였던 백인 인구가 84퍼센트의 흑인 인구를 차별했던 역사는 1948년부터 넬슨 만델라가 집권하기 시작한 1994년까지 지속되었다. 분리, 격리, 산산조각을 뜻하는 Apart에 네덜란드어의 접미사 heid를 붙여 격리를 뜻하는 아프리칸스어였던 aprtheid는, 그 언어의 종주인이었던 아프리칸들을 격리조치하는 정책의 이름이 되었다. 어떻게 모르는 척할 수 있을까.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이 땅에도 침입자들이 있었고, 그들이 이 땅의 주인들을 차별하고 짓밟는 일이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차별하던 자들과 차별받던 자들이 인간의 유한성을 이기지 못하고 삶으로부터 유리되면, 남은 자들도 물론 치욕의 역사를 잊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이 당연한가.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한 일을 반복하는 것은, 게으름과 무지의 소치다.


아모르는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그저 어머니가 유언으로 남긴 약속을 오랜 시간이 지나 그야말로 지켜질 수 있는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지켰을 뿐이다. 안녕, 살로메, 고마워요. 잘 가, 아모르, 그리고 고마워. 다시는 만나지 못할 누군가에게 인간으로서 행해야 마땅한 의무를 행했을 뿐이다. J는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그저 친구들과 조금 다른 외모, 엄마의 출신지 때문에 외톨이가 되어서는 안 되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었을 뿐이다. 그 친구랑은 아직도 친하게 지내? 아니, 이제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몰라. 그래도 친구야? 응, 아마 같은 학교를 다녔다면 여전히 친하게 지냈을 걸. 다시는 만나지 못할 친구에게 자신이 친구라면 건네야 하는 손길을 건넸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세계는 그런 순간 때문에 나아간다. 작가는 메가폰에 대고 이야기한다. 살로메의 출신지가 어디인지 당신이 물은 적이 없기 때문에, 설명한 적 없다고. 세계는 넬슨 만델라와 마틴 루터 킹이 아니라, 세상에 어떤 존재도 무언가의 부속(붙을 부 附, 무리 속 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꿔왔다. 살로메는 누구인지 묻는 사람이 바꿔왔다. 그리고. 실현이 당연한 것을 약속으로 명명하는 나약한 소녀들과 친구와 손을 잡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작은 소년들이 바꿔왔다. 사랑은 모든 것을 정복한다. 그에 힘입어 끝내 지켜져야 할 것을 나도 조용히 발음한다. 이 사소한 약속이 모여 세계는 또 나아갈 것이다. 멀리 훈련소에서 이미 잠들었을 까까머리 J에게. 오래전에 J, 너에게서 배웠던 것을 지키겠다.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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