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고릴라마트

밥테일 베이커리

by Julie

오전에 잠시 생긴 여유시간이 있는 날. 어제처럼 이른 아침 걷기를 하는 대신, 빨래를 두 번 해 널고(수건과 옷은 따로 빨아야 한다는 엄마의 당부에 따라) 설거지를 마치고 나서기로 했다. 따듯해진 뒤로 계속 생각나는 설악산에 가자. 흔들바위, 비선대같이 번듯한 코스는 못 가더라도 신흥사까지 평지를 걷고 라몬타냐에서 잠시 쉬고 싶다.

두 번째 빨래를 돌리는 동안 설거지를 마치고, 이마트 세일 때 사온 냉면, 비빔장, 동치미 육수를 꼭 지금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동으로 외출 시간이 계획보다 늦어진다.


아, 그냥 친구네 카페에 갈까? 친구네 카페 쉬는 날은 새로 생긴 맛있는 빵집 쉬는 날과 겹쳐서, 그 친구는 빵집에 가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곧 빵집 여는 시간이니까 도서관에 책 반납하면서 빵 사서 가자. 그런 생각으로 문 밖을 나섰다.


그런데 친구네 카페가 임시 휴무라니! 가방에는 반납할 책 3권과 갓 구운 바게트랑 먹으라고 싸 온 토마토 1개가 덩그러니 있게 돼버렸다. 일단 책부터 해결해야지. 며칠사이 도서관 벤치에 포도송이 같은 등나무 꽃이 주렁주렁 풍성해졌고, 이팝나무 한그루에도 꽃이 폈다.

무거운 책을 반납하고 가벼운 몸으로 떠날 생각이었는데, 신착도서를 또 안 보고 갈 순 없지. 그런데 올해 들어 가장 많은 책이 새로 들어온 데다 빌리고 싶은 책도 5권 넘게 있다(속초 도서관은 한 번에 5권까지 14일 동안 빌릴 수 있음) 기어코 5권 분량을 꽉 채웠다.


그나저나 설악산은 애매하고, 가려던 친구네 카페는 쉬는 날인데 어쩌나. 아하 근처에 궁금했던 빵집이 하나 있다.

여기 바스크 치즈 케이크가 궁금해서 다음에 한 번 와야겠다 생각했는데 그게 오늘이구나. 마침 문 열기 10분 전. 20여 년 전 학교에 걸어 다니던 길을 따라 카페로 향했다. 지금은 남녀공학이 된 중학교 운동장에 달리기 시합을 하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빵집에는 포장 손님들이 이따금 오가고, 이 빵집이 되기 전에 좋아했던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 밖에 버스 정거장이 하나 있는데, 전에 살던 동네라 여기서 버스를 타고 고등학교에 다녔다.


여기가 고릴라마트였던 때, 나는 매번 지각을 하고 마는 학생이었다.(지금도 그다지 변하지 않은걸 보니, 시간 계산 법이 이상한 듯) 이 버스 정거장에 10분 간격으로 오는 버스 두 대를 놓치면, 택시를 타야 했다. 고등학생이라 택시비는 부담스러워서 차라리 걸어갔던 것 같다.


어느 날 아침 학교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내 앞을 지나가던 자동차 한 대가 잠시 서더니 창문이 스르르 내려갔다.

어이, 고릴라마트!

학교 기술선생님이셨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아담한 체구. 그러나 유머러스하고 늘 당당한 분위기를 풍기셨던 선생님. 태워준다 만다 이런 얘기도 없이 ”학교가냐? “ 하시곤 웃으며 출발하셨다.


왜인지 몰라도 그때 그 선생님 얼굴과 정거장의 풍경이 오래 마음속에 남아있다. 선생님이 내 이름을 아셨는지는 몰라도, 오가며 마주치는 순간마다 여유 있고 따듯한 인상을 받았다.


어이! 고릴라마트

하셨던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은, 졸업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들었다. 그분의 성품을 나만 느낀 것은 아닌지, 유독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제자들이 많았다는 것도.


고릴라마트는 편의점이 되었다가, 벽돌을 붙여 분위기가 확 바뀐 카페가 되었다. 새로 생긴 카페가 얼마 안 되어 문을 닫아서 못내 아쉬웠는데, 분위기가 잘 어울리는 베이커리 카페가 이곳으로 이전해 오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도 버스정거장이 잘 보이는 창가자리에 앉아 예전 일을 떠올릴 수도 있게 되었다.

겉면을 그을린 바스크치즈케이크를 먹으며, 학생들은 학교에 있는 오전시간 나는 카페에 있었다. 이런 어른이 된 게 새삼스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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