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은 너무 자주 하지 말아요

이디야커피 속초 동명항점

by Julie

여름옷이 필요해져서 겨우 내 닫아두었던 서랍을 열었다. 좀 꿉꿉한가 싶더니 같은 칸에 넣어둔 가죽재질 크로스백 겉면에 곰팡이가 피어있다. 빨래해야겠구먼.


마침 세제가 똑 떨어져서 인터넷으로 주문하느라 하루 이틀, 그 사이 비 소식이 잡혀서 또 하루. 미뤄진 빨래를 쌓아놓고, 양말만 손빨래로 빨아 널었다.

아침에 라디오에서 듣기론 서울엔 비가 보슬보슬 온다고. 여긴 흐리기만 하다가 구름이 점점 물러나는 모습이 보인다. 오후에 빨래를 한 번 해 널어야겠다.

곧 6월 망종이 되면, 매실청 담그는 철이다. 벚꽃 피기 전에 매화가 폈다 지곤 조그만 열매가 하나씩 달리더니, 지나가는 길에 본 매화나무에 매실이 제법 여물었다.

이렇게나 빨리 크는구나.

매화나무 옆에는 체리나무도 한 그루 있다. 작년 여름에 꽤나 크고 통통한 열매가 열려서 감탄하며 봤던 나무다.

지나갈 때마다 잘 익어가는 게 보여서 고것 참 아깝네 왜 안 따시지? 했었는데, 어느 날 보니 나무에 열매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내 나무가 아니라서 열매를 취할 생각은 없고, 그저 자라는 걸 볼 때마다 기분 좋을 뿐이다.

(오늘은 운이 좋다. 자주 지나다니는 길에 가끔 나타나는 고양이가 있어서, 내심 ‘오늘도 있을까?‘기대하곤 한다. 고양이 출현 스팟에 가까워지면서 문득 오늘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진짜로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아침부터 한 카페 생각이 난다. 저번에 이디야에 갔다가 벽에 붙은 포스터에서 ‘시그니쳐 라떼’라는 것을 봤다. 먹어보고 싶어서 달력에 적어놨는데, 그걸 먹으러 가야지.


매일 매 순간 하고 싶은 일이 달라진다. 날씨와 기분에 따라. 오늘은 며칠 동안 생각했던 설악산도 그다지 가고 싶지 않다.



영금정 정자, 동명항에 가까운 이디야에 갈 거다. 여기는 속초사랑 카드 가맹점이라 미리 충전도 했다.

이번 달만 파격적인 15% 할인!

속초에 있는 가게들 중 가맹점인 곳에서 쓸 수 있다. 교통카드처럼 충전해서 카드나 앱으로 결제한다. 은근히 가맹점이 많다.

속초사랑 카드로 계산을 마치고 2층 창가에 앉았다. 주변에 여행 오신 분들이나 주로 중년층 손님이 많이 보인다. 뒤따라 들어온 팀도 중년 여성 친구 여행객이다.


고요한 2층 창가엔 나 홀로, 친구 팀은 저쪽 자리에 앉으셨는데, 잠시 언쟁이 일어났다.


“요즘 우리 딸들 가는 카페에 아줌마들이 와서 떠들고 그러면 싫어한대”


“아니 내가 뭘 그렇게 크게 얘기했어? 카페에서 대화하는 건 내 권리지.”


“이야기하는 건 좋은데, 목소리를 적당히 크게 해야 된다는 말이야.”


책을 읽으려고 펴둔 것이 잠시 눈치가 보였다. 대화하셔도 저는 아무 생각이 없답니다 편하게 담소 나누셔요.


친구분 두 분의 말씀이나 마음을 모두 알 것 같았다. 동시에 친구사이는 나이가 적으나 많으나 똑같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창 밖에 보이는 동명항 주차장에, 어느 젊은 트롯 가수의 얼굴이 프린트된 대형버스가 와 있다. 나가면서 각도를 살짝 튼 모습을 보니, 팬덤 색깔이 주황색인 희재 청년이다.


중년의 아이돌로 활동 중인 트롯가수들 덕분에, 팬들끼리 같이 여행도 다니고 열정적으로 함께 일도 해볼 수 있으니까 좋아 보인다.

시그니쳐라떼는 이름과는 다르게 키오스크에서는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서야 찾을 수 있었다. 우유에 크림을 섞어 점도가 있는 고소한 맛 라떼였다.


반드시 프랑 부르주아 거리의
카페 마르키에서
크루아상과 커다란 카페 크렘을
앞에 놓은 채 읽을 것.


지금 나는 속초 동명항 근처 이디야에서 시그니쳐 라떼를 앞에 놓은 채 그의 마지막 편지를 읽는 참이다.

조조 모예스의 < 미 비포 유>를 읽는 중이다. 어느 새벽에 머리맡 조명에 의지해 책을 읽어나가다가 소리 없이 통곡을 하고 말았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포스터도 봤고, 유튜브에서 소개 영상을 봐서 대강 어떤 내용인지 아는 상태였다.


SBS 파워 fm <박하선의 씨네타운>을 자주 듣는데, 금요일에 하지형 성우와 박하선 배우가 오디오 드라마처럼 짧게 영화를 요약해서 들려주는 코너가 있다. 여기서 나온 걸 듣고,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봤다.


꽤 두껍다. 하지만 술술 읽힌다. 어느새 마음속으로 주인공 루이자에게 빙의되어, 죽음을 앞둔 남자를 미워하고 사랑하게 되고 치유받는다.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다가 자기 몸에 갇혀버린 남자가 있다. 무의식 속에 박힌 상처 때문인 걸 모르고, 소극적으로 살아온 여자를 만나 인생 최고의 6개월을 보내게 된다. 그녀가 기다려 온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라는 말을 해주고, 떠나기 전 그녀를 위해 선물을 준비해 둔다.

내 생각은 너무 자주 하지 말아요.
그냥 잘 살아요

사랑을 담아서,
- 윌


책을 읽는데 희미하게 들려오는 익숙한 노랫소리. 애드 시런의 <Photograph>다. 영화 <미 비포 유>의 삽입곡. 오늘 여기 오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구나. 타이밍 기가 막히네.


환해진 창 밖을 보며 작은 눈물을 닦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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