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의 삶

다시 <아워 코지 플레이스>에서

by Julie

창가 자리엔 4개의 의자가 있다. 오래전 앉아본 기억이 있는 딱딱한 나무의자다. 나무의자 앞에는 창문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나무 테이블이 있다. 테이블의 왼쪽 끝은 출입문과 만나고, 오른쪽 끝은 벽과 만나 꼭짓점을 이룬다.


이 꼭짓점을 보통은 구석이라고 부른다. 등이든 몸의 옆면이든 어딘가가 막혀 있어야 무의식적으로 편한 곳이라는 느낌이 들어서인지, 이 자리가 비어있으면 주로 여기에 앉는다. 아침부터 밤까지 줄기차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본 경험이 있는 의자다. 생각보다 편하게 앉아서 막 테이블에 놓인 바스크 치즈 케이크와 아이스 라떼를 먹었다.

눈앞엔 파스텔 블루 색깔 블라인드가 일렁인다. 바깥에서 안을 볼 땐 지긋이 바라보아야 안쪽에 사람이 있는지가 보이는 시간이다. 반대로 안쪽에서 바깥 방향은 선명하게 보인다. 옆집 쪽에서 나타난 고양이는 순간 나와 시선이 마주치곤 깜짝 놀라 눈이 커졌다. 가게 앞에 놓인 화단에서 길게 자라난 잔디 비슷한 것을 뜯어먹더니, 인기척에 후다닥 달아나버렸다.


보라색 토끼풀 같은 꽃은 여름답게 풍성하다.

잘 산다는 건 뭘까?

카페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책장이 있어서, 한동안 들여다보다 마음에 드는 책을 하나 꺼내 읽는다. 대부분은 같은 책이다. 좋아하는 것은 읽고 또 읽고, 듣고 또 듣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왠지 김영하 작가의 책을 고르게 되었는데, 제목이 <단 한 번의 삶>이었다.


그 제목이 허공에 붕 떠다니는 지금 이 순간의 기분과 같아서, 아무 데나 펼쳐 마음에 다가온 부분부터 읽었다. 꿈꾼 것을 기록한 부분부터 시작. 사람 사는 거 다 똑같구나 생각한 것은, 바로 오늘 아침 나도 일어나서 꿈부터 적어보았기 때문인데, 김영하 작가가 꾼 꿈처럼 내 꿈도 뒤죽박죽이었다. 뒤죽박죽인 채로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인 이야기였다.


지난밤 꿈속에서, 나는 어딘지 낯이 익은 부부에게 카페 창업을 위한 머신 사용법을 배우는 중이었다. 그 직전엔 일거리가 남은 청소일을 하러 저녁에 집을 나섰다가, 버스 막차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그냥 내일 하자며 버스에 탔다. 지나가며 바깥 풍경을 보는데, 깊은 산속 사찰 같은 곳에서 사람들이 온천물에 족욕을 하고 나왔다. 이것이 하나의 꿈이다.



책이 아니라면, 에세이가 아니라면 어디에 이런 글을 쓸까? 블로그에는 정보나 광고를 올리고, 뉴스는 누군가에게 있었던 사건을 전한다. 돈이 되려면 그래야 한다. 그 번잡한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면, 개개인에겐 지금의 내가 느끼는 불안함이라는 기쁨이라는 감정들이 모여 만들어진 단 하나의 하루가 있다.


김영하 작가는 영화로도 나온 책을 썼고, 방송에도 나왔고, 유명하다. 그런 사람도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서 자기만의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나처럼 당신처럼 우리 모두가. 어떤 하루들이 모여 결과를 내고, 한동안은 박수와 비난도 받겠지만, 그런 날들도 다 지나고 하루와 나 단 둘이 보내는 시간이 훨씬 길다.


잘 산다는 건 뭘까? 생일이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수많은 주변사람들, 몇 살에 얼마정도하는 집을 가지고 이름이 알려진 회사에 다닌다. 아이는 공부를 잘하고 착하며 미래에 좋은 조건을 보장받는 현재를 살고 있다. 정말 그게 다일까?

어제 집에 돌아오는데 요 며칠에 비해서 시원하고 좋았다. 가을 풀벌레 소리가 들려서 입추가 지났다고 그런가 보다 이야기를 하다가 엄마가 문득 말을 꺼냈다.


”옛날에 막내고모 학교 다닐 때, 설악산 할머니 집 앞에 논밭이었잖아. 지금 펜션 지은데. 여름에 밤에 모기장 쳐놓고 마당에 앉아있으면 개구리 우는 소리 참 좋았다. “


몇 해 전 더위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들여놓은 에어컨이 집에 있다. 그 이야기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틀었다. 에어컨을 얻고 개구리 소리를 잃었다. 어렵고 힘들 때도 나름대로 방법을 찾아 해결하고, 서로 돕고 살던 때가 있었는데, 완벽한 모습이 되려고 혼자 있는 시간 동안 길게 상처받는 그런 시대를 살고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잘 될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막연히 서른 살이 넘으면 내 진짜 인생이 시작될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되어야 잘 되는 걸까?

글을 쓸 거야. 속초가 배경인 소설을 써서 그 책이 영화도 뮤지컬도 되는 걸 봐야지. 그리고 그 이야기를 읽고 세상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오게 해야지.


돈도 잘 벌어서 필요할 때 충분히 사용하고, 세상에 도움도 되어야지. 그러려면 건강히 오래 살아야지.


택배 차가 카페 앞에 섰다. 담배를 입에 문 아저씨가 상자를 문 앞에 털컥, 던져두고 떠났다. 현실이다. 지금이다. 나는 꿈속이 아니라 상처와 기쁨이 뒤섞인 과거가 아니라, 불안하고 기대되는 미래가 아니라, 마지막 말차 바스크 치즈케이크를 싹싹 긁어먹을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있다.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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