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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소리 Nov 30. 2020

칭찬 스티커를 다 모으면

계륵같은 너

  두 아이를 키우면서 해야 할 일들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생긴다. 아이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이 엄마로서 해야 할 일이라면, 억압하고 분노함으로 아이를 두려움에 몰고 가는 것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그런데 때때로 칭찬과 격려가 아이에게 두려움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과 직면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보상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나의 부모님은 '성적이 잘 나와서, 부모님의 말을 잘 들어서, 청소를 잘해서, 심부름을 해서, 백점을 맞아서' 선물을 사주신 적이 없었다. 성적이 잘 나와서 선물을 사달라고 이야기할 때면, 엄마는 당당하게 말씀하셨더랬다. "너한테 좋은 일인데 왜 내가 선물을 사줘야 해?"라고 말이다. 엄마의 이런 교육철학은 매우 독특했지만 나름 효과적이었다. 내가 해야 할 일들과 그 결과에 대해 온전한 책임이 '나'에게 있음을 깨달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되도 내 탓, 잘 못돼도 내 탓이라는 절대적이지만 슬픈 진실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학원이나 과외로 아이들을 가르칠 때에도, 성적이 잘 나온 것에 대해 한 번도 선물을 준 적이 없다. 아이들이 당당하게 "선생님! 성적이 잘 나오면 뭐 해주실 거예요?"라고 물을 때마다, 엄마처럼 대답했다. "내가 왜? 너 성적이 잘 나왔으니까 나한테 선물해야 하는 거 아니고?" 대신 나는 아무 일도 없을 때, 기대하지 않은 날에 선물을 주었다. 그건 대가나 보상이 아닌 관심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내게도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변화가 생겼다. 아이가 자라나기 시작하면서 대화가 되고, 소통이 되는 즐거움도 잠시였다. 아이와 대화가 되면 엄마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지 않은가! 아이들은 한결같이 엄마의, 어른의 이야기를 한 번에 듣지 않는 인격체인 것을 간과했다. 나의 아이도 일반적인 아이들의 성향에서 한치도 벗어남이 없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듣지 않고, 못 들은 척하고, 싫증을 내고, 급기야 짜증을 내는 상태에 이르렀다. 나는 주도권을 가지고 아이를 조정하고 싶어 졌다. 화를 내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아주 효과적으로 아이가 내 말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칭찬스티커'를 꺼내 붙이고야 말았다. 너도 좋고 나도 좋으면 된 거지.


  칭찬 스티커를 다 모으면 선물을 사주기로 했다. 첫째 아이는 오십여 개나 되는 스티커를 다 붙여서 결국 선물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아이는 기회를 절대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동안 절대 사주지 않았던 장난감을 요구했다. 나는 여러 번 고민하고 고심했지만 아이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선물의 경계를 정하지 않은 내 잘못이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선물을 받아 들고 매우 기뻐했고, 둘째는 선물을 받지 못해 매우 슬퍼했다. 두 아이는 서로 자신의 스티커가 몇 개 남았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둘째의 칭찬 스티커가 몇 개 남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다시 즐거움을 되찾았다. 첫째는 다시 새로운 스티커가 시작됨에 설레어하기도 하고, 처음부터 지쳐하기도 했다. "엄마, 언제 다시 저걸 다 모으지?"


  행동에 대한 적절한 보상은 효과적이었다. 아이의 행동과 말을 통제하는데 일곱 살, 네 살 아이들에게 꽤 효과가 컸다. 누나처럼 선물을 받고 싶은 둘째는 엄마의 말을 잘 들었다. 또 선물을 받고 싶은 첫째 아이도 엄마의 말을 잘 들었다. 그런데 이 일은 며칠 가지 않았다. 아이들을 다시 말을 안 들었고 제멋대로였다. 그래서 나는 정말 치사해지기 시작했다. "너 자꾸 이렇게 하면 엄마가 칭찬 스티커 안 붙여줄 거야!" 내 말에 아이들은 다시  말을 잘 듣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그랬다. 말을 잘 듣는다기 보단,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완전히 말을 잘 듣는 것도 아니고 아예 말을 안 듣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통제는 금방 무너졌다. 그래서 나는 치사함을 넘어서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말을 안 들으면 어떡해? 엄마가 칭찬 스티커를 떼어야겠어!" 나는 완벽한 협박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나와 아이들 사이에 칭찬 스티커를 둘러싼 성취감은 깡그리 사라져 버렸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적절한 보상으로 인해 효과적인 통제가 이루어진 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 사이에 성취감이나 동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남는 것은 그놈의 '선물' 뿐이었다. 아이는 목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엄마 말을 들었고, 몸을 움직였다. 과정과 동기가 사라졌기 때문에 행동의 꾸준함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 아이에게 나는 목적을 무기로 협박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에게 칭찬 스티커는 아이를 휘두를 수 있는 적절한 무기가 된 것이다. 또 아이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스티커를 요구하기도 했다. "엄마, 나 장난감 정리했으니까 스티커 붙여줘!", "엄마, 나 밥 잘 먹었으니까 스티커 붙여줘!"라고 말이다. 아이의 이런 태도에 나는 내 손으로 내 발을 찍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이는 자라면서 스스로 해내야 하는 일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스스로 '왜' 해야 하는지 깨닫고 아무런 대가 없이 해야 할 일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식사할 때, 정리할 때, 다투고 화해할 때, 상대를 위해 예쁜 언어를 선택해야 할 때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그것들은 대부분 '그렇게 해야 마땅한', 그 자체로 당위성을 갖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에 대가를 바라도록 교육시키고 있었다. 바른 태도와 습관, 올바른 마음가짐을 가르쳐야 하는데, '선물을 받으니까' 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나는 순간 무서워졌다. 아이가 자라서 관계에서도 대가를 요구하면 어떡할까 겁이 났다. 상대를 배려하고 생각하면서 말하기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얻을 것이 있어서 언어를 선택하면 어쩌지. 


  아이를 키우면서 수많은 '육아 지침서'는 오히려 길을 헤매게 한다. 어떤 사람은 보상이 효과적이라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보상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어찌 보면 이론과 현실의 괴리가 크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론을 잘못 이해하고 행동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많은 이론들과 오류들 사이에서 아이와 엄마가 서로 자라 간다. 이 세상에서 오류를 경험하고 싶은 엄마들이 얼마나 될까. 나도 겨우 일곱 살인 아이와 칭찬스티커를 사이에 두고 팽팽한 긴장을 조성하고 이를 고민한다. '이대로 가도 정말 괜찮은 걸까?' 하고 말이다. 사실 칭찬 스티커는 잘못이 없다. 나의 사용법이 잘못된 걸지도 모르겠다. 육아의 대부분은 사용설명서가 없다. 그래서 오류가 많지만 수정이 가능하다. 


  계륵과 같은 이놈의 칭찬 스티커를 어찌 사용해야 할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만 한다. 나와 아이들에게 맞지 않는 도구라면 과감하게 버릴 줄도 알아야겠지. 모두에게 좋은 것이라고 나에게도 좋은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육아의 길에서 엄마가 처음인 나 말고, 지혜로운 양육자가 한 명 더 있다면 좋겠다. 나의 한계를 깨닫는 순간이 어디 이번 한 번뿐이랴! 그럼에도, 아이러니하게도 나도 칭찬 스티커가 있다면 좋겠다. 나의 칭찬 스티커를 다 붙이고 나면 육아의 오류들이 하나씩 사라진다면, 육아의 지혜가 하나씩 하늘에서 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 결국 이런 맛에 스티커를 모으는구나. 이런 일곱 살 엄마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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