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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소리 Dec 11. 2020

솔직히 다 핑계야

인정하지 않은 거지

  나의 부모님은 나에게 공부 욕심이 없으셨다. 그 덕분에 학창 시절에 마음껏 친구들과 뛰어놀 수 있었다. 나의 언니는 다섯 살 때부터 구구단과 글짓기를 했다고 들었다. 부모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흡수하고 발전시킬 줄 아는 성향을 가졌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하지 못했다. 나도 기억나지 않는 그 시절, 언니와 같은 기대감을 가지고 내게 교육을 시키려고 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나는 뒤로 넘어가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고 하셨다. 그에 대한 효과로 부모님은 '건강하게만 자라면 되지.'라는 마음을 품으셨다고 했다.


  언니와 반대로 공부에 전혀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기대도 크지 않았다. 시험만 보면 백점이던 언니와 다르게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 될 때까지 두 자릿수 사칙연산이 어려웠다. 한 번은 엄마와 마주 보며 두 자릿수 덧셈과 뺄셈을 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의 손에는 길쭉한 매가 들려 있었고, 그 당시의 나는 두 손을 위로 올리고 벌 받으며 계산을 했다. 그 와중에도 두 손으로 열심히 손가락 계산을 하곤 했다. 그리고 나면 어김없이 엄마의 회초리가 내게 향했다. "넌 아직까지 손으로 계산하면 어떡해!"라는 매서운 소리와 함께.


  그럼에도 나는 부끄럽지 않았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공부를 잘하는 게 자랑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부가 내게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유들 때문에 공부하는데 목숨을 걸지 않았다. 더불어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내가 모자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언니와 같이 시험을 보고 나면, 언니는 한 두 개를 틀려서 속상해했고 나는 한 두 개라도 맞아서 기뻐했다. 시험 보는 날은 성적과 상관없이 빨리 끝나고 더 실컷 놀 수 있어서 기뻤다. 집에 돌아오면서 "엄마! 나는 백점이야!"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외치며 들어왔다. 물론 내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학생이 될 때까지 공부에 미련이 없었다. 밤을 새워서 책은 읽었어도, 시험을 위한 공부를 해본 적은 없었다. 지금까지도 암기는 젬병인데, 그 당시에는 외우라고 하는 말이 제일 싫었다. 시험공부를 위해서는 갖가지 과목의 이상한 용어들을 외워야 했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 용어를 그저 암기하는 것을 할 수 없었다.  학원이나 과외도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공부를 잘 못한다 뿐이지, 맞을 일이 없었다. 그런데 학원에서 선생님이 혼내고 때리는 것이 아닌가. 가뜩이나 공부하는 것도 싫은데 선생님이 때리기까지 하니 더욱 가기 싫었다. 보다 못한 아빠가 내게 독서실이라도 다니라고 한 달 치 이용권을 끊어주셨는데, 고작 하루 나가고 다신 가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공부가 싫었다기보다, '억압'하고 '강요'하는 상황이 싫었다. 단순 암기가 싫은 이유는 이해되지 않은 것들을 무작정 외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세계사를 공부할 때,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많고 외워야 할 분량이 많아서 백 번도 넘게 교과서를 읽었다. 이해와 납득이 되지 않으면 머릿속에 남는 것이 없었다. 그 상태로 문제집을 푼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래서 무작정 읽는 것만 했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읽기를 반복했었다. 그게 내 학업 스타일이었다. 이런 내게 "무조건 외워!"라는 말은 폭력이었다. 나름의 공부 스타일을 익히고 개발하고 나니 그다음부터는 공부가 즐거워졌다.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기쁨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 것이었다.


  첫째는 이런 나의 성향을 고스란히 닮았다. 무작정 가르치려 들면 튕겨나가기 일쑤였다. '요 녀석이 닮아도 되지 않는 부분만 닮았구나.' 싶었다. 그래서 그냥 아이가 여섯 살이 될 때까지 두었다. 자신이 필요하면, 할 때가 되면 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내버려 뒀다. 때마침 첫째가 네 살 겨울, 다섯 살이 되는 그 해에 필리핀으로 떠나게 되었다. 핑계 삼아 아이를 더 실컷 놀게 그냥 두었다. 마음껏 놀도록 내버려 두기만 했는데, 마주하고 싶지 않은 그 날이 오고야 말았다. 해를 거듭하며 일곱 살이 된 아이에게 입학할 준비가 필요했다. 아이에게도 학습이 필요한 시기가 찾아온 것이었다.


  필리핀에 있으니 아이를 가르쳐야 하는 건 오로지 내 몫이 되었다. 계속 필리핀에 머물게 될지, 한국으로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글', '영어', '수학'을 가르쳐야 했다. 현실을 깨닫고 주위를 돌아보니 또래 아이들은 모두 현지 유치원에 다녀서 영어와 수학이 익숙한 상태였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남의 집 아이들과 우리 집 아이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조급한 마음이 덜컥 들기 시작하면서 아이를 쥐 잡듯이 잡기에 이르렀다. "똑바로 엄마 얘기 들어!", "정신 차리고! 엄마 눈 보고!", "어허! 멍 때리지 말고!" 갖가지 협박으로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익혔다. 공부시간에 울지 않는 날이 없었다. 아이는 엄마가 무서워서, 혼이 나서, 머리를 쥐어박혀서 울었다.


  '공부를 못해도 좋아', '쟤는 나를 닮아서 무조건 시키면 싫어할 거야', '좋은 대학이 다 무슨 소용이야', '공부를 잘하는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게 더 좋아.'라는 나의 다짐들이 무색해져 갔다. 나는 또래 엄마들보다 더한 사람이 되어갔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해서, 공부시간에 하품을 해서, 방금 배운 것을 기억하지 못해서, 혼냈는데 울어서 혼을 냈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르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는 기쁨을 느끼기는커녕, '공부하자'는 말만 들어도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게 되는 건 아닌가 싶었다. 아, 내 자식을 가르치는 일은 왜 이토록 어려운 일인가.


  내 아이를 가르치다 보니 자꾸 욕심이 생겼다. 다른 아이들을 가르칠 때, 한 번도 다그치거나 억압한 적이 없었다. '모를 수도 있지',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지', '나도 그랬어, 괜찮아. 천천히 해도 돼'라는 느긋하고 너그러운 선생님은 더 이상 없었다. 조급한 마음에 욕심이 생겨서 아이를 다그쳤다. "왜 이걸 몰라? 방금 아까 했던 건데 기억이 안 나? 정신 안 차릴래?" 나는 자꾸만 아이를 구석으로 밀었다. 차라리 첫째 녀석이 나처럼 거품 물고 쓰러지는 게 나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된 것이다. 나는 가르치는 것을 그만두고 남편에게 미뤘다. 내 마음부터 고쳐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마음을 고쳐먹기까지 오래 걸렸다. 우선 나의 가면을 벗고 진짜 속내를 들여다봐야 했다. 욕심이 없다고 했지만, 공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다짐했지만, 실은 남의 집 자식들에게 뒤지고 싶지 않았다. '내 자식이 뭐가 모질라서'라는 마음이 앞섰다. 내 아이가 다른 사람 앞에서 '모지리'처럼 보이는 것이 싫었다. 내 욕심과 마음을 확인하고 하니, 그 안에 아이에 대한 마음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아이가 언제 즐거워하는지, 어떻게 하면 얼지 않고 편안하게 학습할 수 있는지 고민하지 않았다. 상대를 배려하고 생각하지 않는 마음은 억압과 강요였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그 올무에 스스로 걸리고 만 것이다.


  그 마음을 깨닫고 '이 아이는 내 자식이 아니다. 남의 집 애다. 나는 과외 중이다.'라고 고쳐먹었다. 스스로 세뇌시킨 이 주문은 꽤 효과적이었다. 한동안 친절하고 느긋한 선생님 같은 엄마가 되었다. 그런데 그 주문도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다시 번번이 실패해서 눈총을 쏘고 윽박지르고 화를 내며 급기야 아이를 쥐어박았다. 나 자신을 깨달아도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인가 싶었다. 마지막 히든카드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대체 나를 어떻게 키운 거야? 나는 이렇게 속이 터질 것 같은데 말이야!" 엄마는 깔깔거리며 속 시원한 웃음을 터트리셨다. "속이 터지는 줄 알았지. 그런데 어쩌겠어, 그게 너인데."라고 말씀하셨다. 아, 인정이었다.


  엄마의 기다림 속에는 나를 인정하는 마음이 있으셨다. 엄마라고 왜 조급한 마음이 없으셨을까. 다만 '너는 그런 아이구나'라는 마음이 먼저였던 것이다. 다 알고 있으면서 속아주고, 다급해하며 다그치지 않는 양육 방식에 인정이 숨어 있었다. 엄마의 인정을 먹고 자랐기 때문에 공부를 못해도 부끄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네가 속이 터지더라도, 그냥 내버려 둬. 널 닮아 어쩔 수 없어."라고 다시 한번 호탕하게 웃으셨다. 엄마의 호탕한 웃음이 조금 얄미웠지만, "그러게 엄마. 날 닮아버렸네." 하고 웃어버렸다.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자라면 좋겠다는 생각만 가득했지 아이를 그 자체로 인정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러니 그 무엇 하나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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