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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소리 Dec 13. 2020

너와 함께 춤을

너의 즐거움에 동참할게

 어릴 적 엄마 손에 이끌려 피아노 학원에 간 적이 있다. 공부를 시키려고 열심이지 않았는데, 피아노는 열심히 보내셨다. "엄마! 나는 피아노가 정말 싫어. 너무 재미없어."라고 수없이 이야기해도,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살면서 악기 하나 마음대로 다룰 줄 안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아니?" 엄마는 폭풍 잔소리를 쏟아내시며 틈만 나면 피아노 학원으로 나를 보내셨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이사를 꽤 많이 다녀서 전학도 여러 번 다녔다. 초등학교 1학년, 3학년, 5학년 때 전학을 다녔었다. 엄마는 새로운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적응하기도 전에 동네 피아노 학원을 수소문하셨다. 엄마의 지극정성으로 이사 간 새로운 동네마다 피아노 학원에 등록하게 되었다. 그렇게 열심히 다니면 실력이 늘 법도 한데, 예체능에는 전혀 소질이 없던 모양이었다. 아무리 피아노를 열심히 치더라도 눈 앞에 보이는 성과가 없었다. 사실 피아노 학원에서 선생님께서 내주신 연습량을 한 번도 제대로 해낸 적이 없었다. 선생님께서 하농이나 체르니의 곡을 열 번 치라고 말씀하고 나가시면, 어김없이 건반을 가지고 제멋대로 치다가 '바를 정'을 그렸다.


  하루는 선생님께서 정말 치기 싫은 곡을 스무 번 정도 연습하라고 말씀하셨었다. 아무리 여러 날 같은 곡을 연습해도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진도를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음 곡으로 넘어갈 수 없어서, 정말 하는 수 없이 내주시며 연습실을 떠나셨더랬다. 그런데 나는 정말 그 곡이 너무 싫었다. 소나타 중의 한 곡이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연습하고 손가락을 굴려봐도 선생님과 같은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나는 그때에도 못된 성질머리를 가지고 있어서 피아노를 발로 뻥뻥 찼다. 아무리 뻥뻥 차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건반을 마구 두드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던 한 언니는 선생님께 가서 "쟤 미쳤나 봐요! 빨리 와보세요!"라고 외쳤었다.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렇게 피아노를 싫어했는데 엄마는 포기할 줄 몰랐다. 기어코 꾸역꾸역 체르니 40을 치게 하셨고, 재즈까지 넘보게 하셨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엄마의 피아노 올무에서 풀려났다. 엄마는 피아노에 대한 집착을 버리셨고, 강요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성인이 되자 악기를 칠 줄 아는 것이 즐거워졌다. 음악과 관련된 영화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뮤지컬이나 대학로 소극장의 공연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스스로 진짜 음악의 즐거움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음악이 주는 기쁨을 알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피아노를 '더, 열심히, 심화해서' 배우고 싶은 욕심은 생기지 않았다.


  애초에 예체능에 큰 재능이 없었다. 그나마 꾸역꾸역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근근이 피아노를 배웠기 때문에 이 정도라도 익힌 것이었다. 음악을 잘하고 싶은 욕심보다 좋은 음악을 듣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좋은 소리를 내고 싶은 욕구보다 좋은 소리를 찾아 듣고 싶은 욕망이 앞선다. 내게 음악은 주체적이지 않을 때 비로소 온전한 즐거움을 준다. 내가 좋아하는 소리를 찾아 듣고 그 즐거움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니, 내 아이도 그 즐거움을 느꼈으면 했다. 아이는 몇 번이나 악기를 권하는 나를 거절했다. 그 옛날의 엄마처럼 "나중에 네가 연주할 수 있게 되면 얼마나 좋은데.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아는 게 좋아."라고 말했다. 그런 나에게 첫째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잔소리쟁이."


  음악의 즐거움을 이야기하는데 잔소리가 웬 말인가. 그 이후로 나는 악기를 권하지 않게 되었다. 스스로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면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큰 기쁨을 억지로 만들어 넣어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발견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할 영역인데, 인위적으로 만들어준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새록새록 생겨나는 욕심과 안타까움을 어찌할 수 없었다. "정말 피아노 배우기 싫어? 그럼 바이올린은 어때? 아니면 첼로도 있어." 그런 내게 딸아이는 "엄마, 나는 노래하고 춤추는 게 더 좋아. 피아노 치기 싫어." 이미 첫째 아이는 음악의 즐거움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또 나만 몰랐다.


  아이에게 취미와 특기를 '마련'해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내가 자라온 모습 그대로 아이를 양육하려 했다. 진저리 치게 싫었던 그 환경 속으로 아이를 몰고 가며, 그것이 나의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합리화했다. '아이가 잘하는 것을 발견해서 심화시켜주면, 훗날 아이의 장래가 될 거야.', '미술이나 음악, 체육에서 하나씩 잘하는 것이 생기면 취미나 특기로 발전할 수 있을 거야.', '엄마의 다독임과 끈기가 아이를 자라게 하는 거지.'라는 갖가지 생각은 오만이었다. 사실 내가 자라온 방식대로 밖엔 생각하지 못했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이미 더 넓게 바라보고 있는 아이의 시각을 자꾸 한정하려 했다.


  첫째 아이는 마트에서나 길에서 음악 소리가 들리면 춤을 춘다.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춤추는 아이를 바로 세우는데, 아이는 그런 나를 피해 자꾸 춤을 춘다. 길을 걷다가 신기하고 묘한 포즈를 취한다.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갖가지 동작을 취하며 "엄마 어때?"라고 묻는다. 잠자리에 누울 때, 인형을 가지고 놀 때면 자신만의 노래를 만들어 부른다. 스스로 만든 노래를 실컷 부르고 나면 또 "엄마 어때?"라고 묻는다. 아이에게 음악은 벌써 생활화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아이에게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아야'한다는 건, 얼마나 고지식한 생각일까. 나의 경험이 최선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자꾸 그 틀 안에 갇혀버린다. 스스로 한계를 지우고 나니, 그 선에 맞추려고 나와 아이를 합리화한다. 아, 오늘은 아이와 말도 안 되는 막춤을 춰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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